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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ul 18. 2021

손 쪽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늘 고집하던 옷과 다르게 편한 추리닝을 입었고 피곤해서 눈도 많이 풀린 날이었다. 이런 꼴로 엘리베이터 1층에서 내리는데 어떤 남자분이 눈에 들어왔다. 난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주로 눈을 피하는 쪽이다. 이상하게 그에겐 그러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끌리듯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가 엇갈렸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뒤돌아 그를 봤다. 첫눈에 반한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뭔가 자주 볼 것 같은 느낌이랄까. 며칠 동안 그 사람이 생각났다. 회색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었고 키는 약 178cm, 머리를 내려서인지 약간 소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짝다리를 하고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어슬렁 걸어오는 걸음걸이에서 무심함이 보였다. 그가 궁금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동료들과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손에 든 채 엘리베이터로 갔다. 그때 맞은편에서 그가 걸어왔다. 내가 그를 본 것처럼 그도 나를 봤다. 난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보며 반지 여부를 확인했다. 일단 반지는 없었다. 나지막이 말했다. "다행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만원이 되기 직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는 타지 못했다. 언제 또 그를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괜히 조급해졌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그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몇 층에 일하는지도 모르고, 알 수 있다고 해도 언제 그를 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쪽지를 썼다. 어떤 멘트를 써야 촌스럽지 않을지, 부담스럽지 않을지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자주 보는데, 혹시 다음에 보면 점심 같이 먹을래요?' 쪽지를 전해줄 생각에 점심시간만 되면 괜히 설레었다.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쪽지를 전해야 하는 미션이 더해져 심장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카페에서 그를 기다렸다. 숨이 조여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점심시간만 되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도 못 보고 내 마음도 답답한 채로 끝날 것만 같았다. 매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기웃거렸지만 여전히 그는 없었다. 그렇게 또 3주가 지났다.  


 그러다 우연히 올라간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 그를 봤다. 하필 편지를 놓고 온 날이었다. 편지가 아닌 말로 직접 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밟으며 담뱃불을 껐다. 다섯 걸음만 가면 말을 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데, 그 사이에 그는 문을 열고 옥상 밖을 나갔다. 문을 열고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를 그를 만났기에 해야 할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일을 그만둔 게 아니니 또 기회가 오지 않을까.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꾸깃꾸깃해질 때쯤 새 편지지에 글을 옮겼다. 세 번째 편지지를 바꾸던 날이었다. 다음날 옥상에 올라가려고 문을 열자 그가 나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 차린 뒤 그를 따라 내려갔다. 이미 몇 걸음이나 늦은 탓에 사무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봤다. 16층 건축사무실이었다. 


 다음날, 어제 그 시간에 올라가니 그가 있었다. 점심때쯤 옥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그에게 편지를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너무 간단한 일이었지만, 편지든 손은 너무 무거웠다. 나는 매 순간 그를 스쳤다. 편지를 전할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 바보라고 자책했다. '내일도 편지를 못 주면 그냥 포기할래." 굳게 다짐하며 편지 줄 때 멘트를 연습했다. 

 "저기요. 이거 꼭 주고 싶었어요" "저기요. 이거 꼭 주고 싶었어요." 수백 번은 연습을 끝내고 옥상에 올라가니 그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었던 며칠 전처럼 그를 또 못 보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타이밍을 또 놓친 걸까. 완벽한 타이밍이란 없는 법이며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은 타이밍 일지 모르는데. 나는 왜 그에게 편지를 줄 수 없는 것일까. 답답했다. 다음날이 되면 무조건 주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또 다짐만 했다.


 다음날, 밥 먹으러 가는데 그가 있었다. 뒷모습만 봤는데도 눈에 띄었다. 오늘은 꼭 전해야겠다. 긴장했는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대충 밥 먹고 옥상에 올라가서 그를 기다렸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그는 오지 않았다. 왜 내가 마음을 먹으면 오지 않는 것일까. 내려가려고 하자 그가 올라왔다. 통화하고 있었다. 일단 다시 테라스로 나갔다. 그가 전화를 끊길 기다렸는데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는 뜨거웠고 마스크로 햇빛이 흡수돼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자 어쩔 수 없이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그때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였다. 그는 나를 앞질렀다. 그를 잡아야 했다. "저.."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손이 보였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없었던 반지. 갑자기 모든 게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이게 뭘까. 반지라니.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던 걸까.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타이밍을 또 놓쳤다. 허탈했다.


"나 오늘도 못 전했어. 그 사람 손에 반지가 있더라."  

"그래도 편지는 전하는 게 좋지 않아? 그걸 주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연습했잖아. 그 사람 말고 너만 생각해. 안 주면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그게 커플링이 아닐 수도 있고." 


 한동안 힘들었다. 난 이 답답한 마음을 끝낼 수 있는 날이 왔다. 내가 이 편지를 전해줘도 답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지나치기엔 한 동안 마음 졸이며 설레고 답답했던 감정이 아쉬울 것 같았다. 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그에게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정말 여자 친구가 있는 게 맞다면. 좋아하면 좋아한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내가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보기도 힘든 사람이다. 스스로를 토닥이며 굳게 다짐했더니 하루에 그를 세 번이나 마주쳤다. 네 번째이길 바라며 옥상 문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을 때 옥상 문이 열렸다. 그였다. 그를 따라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기요. 이거 예전부터 주고 싶었어요."

"아 죄송한데, 저 여자 친구 있는데"

"아, 그런 건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뭐가 그런 건 아닌지, 그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고 재빠르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말을 했을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말하고 나니 무언가 후련했다. 안 줬으면 내가 그 편지를 버렸을 텐데. 편지를 주고 나니 진짜 별거 아니었다. 여자 친구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표현했다는 게 좋았다. 역시 그는 답이 없었다. 


 편지를 전한 뒤로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표현 한 덕분인지 딱히 대화를 나눴던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점심시간에도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 1층에서 그를 봤다. 그는 고개 숙이며 핸드폰 보다가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리자마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내게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며칠 만에 봐서인지 반갑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그가 뒤늦게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도 내게 인사했다. 이상하게도 무언가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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