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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Sep 12. 2019

비상연락처

취미가 필요해서 동화책 모임을 신청했다. 신청서에는 이름부터 연락처, 비상연락처, 신청 이유를 적는 칸이 있었다. 빈칸을 채우다가 비상연락처에서 머뭇거렸다. 지금은 부모님과 떨어져 친구와 같이 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망설임 없이 바로 부모님 번호를 적었을 텐데, 순간 고민했다. 나한테 급한 전화인데, 내가 받을 수 없다면 누가 내 전화를 대신 받고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친구 번호를 적었다. 단순히 같이 살고 있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부모님과 대화하는 게 어려울 때가 많다. 어플을 다운로드하는 것부터 물건을 구매하는 방법까지 여러 번 설명드려도 다음 날에 한 번 더 물어보시곤 했다. "나이 드니까 자꾸 잊어버려" 부모님은 핸드폰 어플 다운로드부터 각종 서비스와 신조어까지 빠르게 바뀌고, 생기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셨다. 당연했다. 나도 버거운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엄마는 주로 동생과 내게 간식으로 햄버거를 사주셨다. 이젠 패스트푸드점에서 기계로 햄버거를 주문해야 한다. 기계를 보자마자 겁부터 난다고 하셨다. 


단순히 시대 뒤쳐짐 때문만도 아니다. 엄마가 나와 관련한 전화를 받았을 때 대처방법을 몰라서 상대방이 더 당황스러울 수 있다.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왜 전화했는지 등을 나한테 잘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난 친구 번호를 적었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한글부터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지만, 지금은 스스로 배우고 있다. 부모님이 알고 계시는 것보다 인터넷 검색하는 게 더 빠를 때도 있다. 의견을 물어보면 엄마는 “네가 대학 나왔으니까 나보다 더 잘 알지”라고 말했다. 이젠 내가 부모님을 지켜주고 알려줘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분명 부모님이 나를 지켜줄 상황은 있다. 하지만 가벼운 선택사항에선 부모님보다 친구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사실이 가끔은 씁쓸하다.


부모님도 늙는다는 걸 잊을 때가 많다. 당연한 사실인데, 나 하나 먹고살기 힘들어서 부모님을 챙기지 못할 때가 많다. 엄마가 할머니 댁에 가려고 터미널에 갔다가 매진이란 말에 다시 집으로 오셨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방법을 몰라서 직접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서운했다. 내가 너무 바빠 보여서 물어보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나는 별로 바쁘지도 않고, 바쁘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데. 내가 엄마가 필요했을 때가 있었던 것처럼 엄마도 내가 필요할 때 나한테 의지했으면 한다. 자꾸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단순히 비상연락처일 뿐인데 시대의 뒤쳐짐과 세월까지 생각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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