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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Dec 23. 2019

탈코르셋과 절약

아이를 키우다보니 저절로 탈코르셋을 했다. 세간에 떠도는 미(美)의 기준을 맞추지 않게 되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이나 머리를 감을 시간이 없었다. 매일 바르던 하이라이터와 아이라이너를 생략하고, 눈썹을 그리지 안... 아니 못 했다. 당장 애 병원 예약 시간이 급한데 내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부족한 시간 안에 우선 순위를 잘 매겨야 했다. 아픈 아이가 꽃단장보다 중요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음식물 쓰레기 하나 버리러 갈 때조차 비비크림을 발랐었다. 잡티 보이는 거무잡잡한 얼굴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못난 얼굴, 내보이기 싫었다. 어쩌면 나는 나의 못난 점을 용서할 수 없는 매서운 마음을 가졌던건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카카오톡 프로필로 아이 사진을 썼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꾀죄죄한데 애는 (지극히 엄마 눈에는) 예뻤다. 불완전한 나대신, 완전한(지극히 엄마 눈에는) 아이가 나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꾸밈만 하게 되었다. 긴 머리와 쿠션 팩트, 그리고 립스틱. 딱 거기까지만. 나머지 시간은 아이의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겼다.

그런데 내가 썬크림만 바르던, 이틀간 머리를 못 감았던, 6개월간 펌을 하지 않았던,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청소년기의 자기 중심성을 갖고 살아왔던 모양이다. 위생에 대한 사회적 상규를 넘어서지 않는 한 어떤 모습이든 상관 없었다. 예의바른 무관심이었다.


탈코르셋은 결국 온전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한 운동이다. 사람들은 각자 살 길이 바빠서, 사실 내게 큰 관심이 없다는게 힘이 되었다. 동시에 나 또한 타인의 외모나 복장을 두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세상에는 외모 치장보다 더 우선순위인 일들이 있기 마련이란 것을, 아이 낳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외모의 기준을 타인에게 두는지 않고, 자신에게 두면 됐다. 머리를 길러야 해서 기르는게 아니라, 기르고 싶어서 기르고, 눈썹을 그려야 해서 그리는게 아니라, 그리기 싫으면 안 그린다. 간단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한, 외로웠던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똑같은 패딩을 몇 년 째 입든 관심 없다. 나는 패딩을 오래 입는 대신, 더 적게 벌고 더 자유롭게 살기로 했다.


절약도 그랬다. 사람들은 내가 똑같은 패딩을 7년째 입든, 10년째 입든 관심이 없다. 차가 1대인지, 2대인지 잘 모른다. 혹은 독특하게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이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그러려니 한다. 시간이 많거나, 성향이 그런가보다 넘어간다. 


'아, 당신의 생각은 그러하시군요. 나랑 다르네요.'

하고 말이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갖춰야 '해'서 사들였던건지, 진짜 필요 해서 구매한건지,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인다. 이 과정을 통해 체면 소비가 줄었다. 그리고 더 후련해졌다. 그만큼 내 삶에 더욱 집중했다는 의미였다. 비합리적인 체면보다 진짜 내 삶 말이다.


동시에 사람들이 가진 물건으로 그 사람의 삶 전부를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저 사람은 환경 운동가일 수도 있고, 작은 집에 사는 저 사람은 주거비용을 줄여 돈에 쫓기지 않는 삶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가진 물건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부를 내멋대로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무례한 속내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환경을 위해 소비 말고 절약을 택했다.

나는 신상 패딩을 사기 위해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결혼 전에 산 패딩을 7년째 입을지언정, 무급 육아 휴직으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택했다. 육아를 위해 소비 말고 절약을 택했다.


나는 최신 가전 제품을 들여 몸이 편리해지는 것보다, 갖고 있는 물건을 오래 씀으로써, 지구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쪽을 택했다. 환경을 위해 소비 말고 절약을 택했다.


나는 두 대의 차를 끌어, 이동거리를 넓히는 것보다, 1대의 차로 네 식구가 움직이는 작은 생활 반경을 선택했다. 덜 바쁜 삶을 구성하기 위해 소비 말고 절약을 택했다.

육아로 인한 시간 빈곤 때문에, 탈코르셋을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루 예산 15000원이라는 제한선이 있는 덕분에, 나다운 소비도 한다. 탈코르셋으로 최소한의 꾸밈만 하며, 절약으로 최소한의 소비를 한다.  그 공통분모는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나 답게 사는거. 소비에 있어 '나다움'을 추구한다. 소비의 탈 코르셋. 나 다운 소비가 무엇인지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다. 무엇을 살(Buy) 것인가의 결정은, 어떻게 살(Live) 것인가로 귀결된다. 절약 속에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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