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하는 꽃언니와 한 잔 하기로 했다. 언니도 나도 애 셋, 애 둘 엄마다. 그러니까 경험으로 안다. 아이 키우는 부부 중 한 명의 빈 자리는 다른 한 명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걸 말이다. 자연히 한 잔 기울이는 시간을 밤 10시로 정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 나 한 명 잠시 외출해도 남편에게 미안하지 않을 그 시간.
아이들 다 재우고 만나는 일인데도 눈치가 보였다. 귀 밝은 첫째가 일어나서 엄마를 찾으면 어떡하지? 둘째가 뒤척이다가 엄마 없어서 잠에서 깨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 몫은 오롯이 남편에게 부담이 될게 뻔했다.
미안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해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다짐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몸으로 습득된 '엄마, 아내 혼자 다 떠안아야 할 역할이 있다'는 비합리적 신념 때문에!) 평소에도 아이들 재우고 나면 나는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남편은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는다. 나는 아이들의 '낑~'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남편은 편하게 할 일 한다.
그러니 혹여 내가 꽃언니와 수다를 떠는 동안, 아이들이 깨서 아빠 품에 잠들어야 한다 해도, 남편도 한 번 쯤 해봄직한 일이다.
결국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잠들자 마자, 입던 옷에 잠바만 걸치고 차 키를 챙겨 현관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니를 만날 생각에 활짝 웃으며.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 안전이 최고야. 알지? 안 자고 기다릴게."
아이를 맡기고 가는게 죄 짓는 일인냥 느꼈던 강박증은, 역시나 혼자 판 땅굴이었다. 남편은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어두운 밤길 운전만 조심하라며 당부했다.
엄마 다움, 아내 다움에 대한 주문이 내 몸에 새겨진 것 같다. 어릴적부터 보아온 것, 교과서에서 배워온 것, 드라마에 비춰진 것 모두를 깊숙히 체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이 불편해졌다. 세상의 규칙과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엄마도, 아내도, 친구와 깊숙한 밤 하늘 아래에서 은은한 초 옆에서 수다를 떨 수 있다. 아이를 두고 밤마실을 나가는 엄마의 시간이 일탈로 묘사되기 일쑤였던 탓일까. 이 시간을 갖기까지 마음이 무거웠다. 직무유기를 한 듯 죄책감이 들어 우울했다.
하지만 엄마와 아내로서 24시간을 헌신해야 한다는 기존 가치관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 조금 불편해지니까 자유롭고 행복했다. 모두 책 덕분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이 Sports와 Sex와 Screen, 그리고 Soma(마약)라는 4S의 감각적 행복 세계를 거부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지금은 불편하다 느낄지 모르지만, 이게 더 길게 남은 나날의 쾌적함을 가져다 줄 '혁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면 행복해지는건 페미니즘 뿐만이 아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상식도 불편해진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거, 전문가에 대한 의존이 합리적이라는 거,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무례함과 궂은 일에도 담담해져야 된다는 거, 지방은 공동체 주의로 폐쇄적인 집단이며 문화와 자본, 교육이 결핍된 장소라는 것까지.
프로 불편러는 시시콜콜 불만 투성이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편함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함을 갖춘 덕분에, 고민하고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상식을 의심하다보면, 우리의 세계관이 옳기 때문에 편안한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편한게 아니라 익숙한거란걸. 그러니 진보하고자 하는 세상에는 프로불편러가 필요하다.
그러니 나도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 존에게 찬성 한 표 던진다.
"나도 불편한 편이 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