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물이 좁아도 괜찮다고만 한다.
나는 책과 글이 전부인 세계에 산다. 작은 바닷가 마을이 서울 같은 메가시티처럼 모든 걸 갖추고 있을리 없다. 바깥 나들이 하기 힘든 요즘, 동해시에서 갈 만한 데는 빤하다. 바닷가 도서관, 집 앞 책방, 바닷가 책나라, 바닷가 미술관.
큰 건물을 지어 돈을 버는 도시가 아니라, 산과 들, 바다에 놀러 온 사람들이 커피 한 잔, 어묵 하나 사먹는 주머니 돈으로 돈을 생계를 잇는 도시다. 큰 건물 안에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팔아서는 난방비도 나오지 않는, 아주아주 소박한 사람들이 산다.
그래서 내 시야는 좁다. 동해 사람들이 돈을 버는 산과 들, 바다는 변함 없다. 그러니 매번 보던 것만 본다. 익숙해진다. 불편한 줄 모른다. 소비할거리도 없다.
살게 없어서 안 사는 주제에, 나는 잘도 떠든다. 번 돈 보다 적게 쓰자면서. 꽃의 힘을 믿어보자며. 자연과 함께라면 상품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는 되는데, 왜 당신은 안 되는거냐며. 건방을 떤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를진데, 너무 쉽게 말한건 아닌지 조심스럽다. 좁은 내 세계에서는 아주 쉽게 돈 안 써도 무기력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내가 집밥을 고집하면, 못 먹게 되는게 기껏해야 치킨이나 짜장면 정도다. 그런데 내가 집밥을 포기한 대가로, 차이나 타운의 온갖 중국 요리들이라든가, 유명 셰프의 프랑스 요리를 못 먹는거라면. 나는 그래도 두부 구이와 배추전을 먹으면서 '등따시고 배부르니 행복하구나'하며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부모 힘으로 키우는 육아를 고집하면, 고작 포기하는 건 영유아 학습지나 부직포 뒤집어 쓴 문화센터 오감놀이 정도다. 그런데 만약 우리 아이들이 엄마 때문에 경험하지 못 하는 것들이, 'Fire'와 관련된 온갖 것을 배우기 위해, 소방관 옷을 입어보고, 현지 영어 선생님과 불끄는 놀이를 하는 그런 것들이라면. 나는 그래도 부모의 힘으로 기르자고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 자기 합리화가 힘들지만 안 힘든척, 싫으면서 좋은척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가진 소박하고 단순한 상황을 즐길 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럴듯한 부분만 화면 안에 잡아 셔터를 누르는, 포장된 사진 같은 삶은 아니다. 그저 내 화면 안에 있는 삶을 좋아하고, 다른 화면 속 삶의 즐거움을 모를 뿐이다.
좁은 우물 안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넓은 바다에도 그 나름 살아가는 행복이 있다. 나는 단지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익혔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 같은 촌뜨기도 자기 우물 안에서는 풍요로워 한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