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 Forest

by 경희

2020. 09. 13


< RAIN FOREST >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아주 화창했다. 물론 비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본때를 보여주자며 처음으로 개시한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새하얀 구두를 또각거리며 그를 만나러 가던 길. 가벼운 발걸음을 보아 첫 소개팅인 만큼 조금은 기대를 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내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버렸다. 가장자리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냉큼 자리를 잡고, 커피를 못 마시는 터라 못내 주문한 아이스초코를 쪽쪽 빨며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렸다.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를 재생시켜 보기도 하고,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기도 하고, 미동도 없는 핸드폰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처음 만나는 날부터 이렇게 당당하게 늦다니.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덩그러니 두다니. 속으로 마이너스 백 점을 주겠노라고 욕을 퍼붓던 찰나, 옆에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훅 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방금 막 맞은편에 착석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비에 쫄딱 맞은 듯했다.

그제서야 창밖을 보니 어느샌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다 입을 뗐다.

"예쁘세요."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안녕하세요도 아닌 대체 왜 저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인가. 나를 당황시키기 위한 작전인가. 누가 봐도 내추럴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옷차림에 비례해 도무지 똑 부러지는 느낌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데. 그렇다면 저 어리바리해 보이는 눈빛 속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분노에서 연민으로 감정이 뒤바뀌었나.

나도 모르게 그를 측은하게 바라봤나 보다. 그런 내 눈빛을 조금은 의식했는지 그가 말했다.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다 맞고 왔는데 도착해서 가방을 열어보니 우산이 있더라고요."

"예전에 넣어놓고 깜빡 잊어버렸나 봐요. 바보같이."

그리고 이내 그는 정말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배시시한 웃음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첫 소개팅 자리를 나가고 싶어 하겠는가.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날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가 조금은 신기했다.

"괜찮으세요? 좀 추우실 것 같은데 따뜻한 거 드실래요?"

"아, 제가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다른 걸 먹겠다며 그가 가져온 음료는 바로 아이스초코. 커피를 잘 못 마시는 나와 뜨거운 걸 잘 못 마시는 그가 고른 메뉴는 웃기게도 아이스초코였다. 나와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향수 뿌리세요? 아까 향이 되게 좋던데."

그에게 물었다. 그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집 안 곳곳에 인센스 스틱을 피워놓으신다고했다. 그에게는 이미 너무 익숙한 향기라 나지 않지만, 내가 맡은 향은 아마도 이 향인 것 같다고 답했다. 비가 잔뜩 오는 날 숲속에서 날 법한 상쾌한 향. 비가 막 그치고 빗물을 머금은 풀잎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운 향.

오늘 비가 와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확실한 것은 살면서 처음 맡아본 향이라는 것이었다.

독특하면서도 알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의 향이 내심 좋았다.

굳이 향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몸에 향이 배어있는 그가 새삼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일어날 시간이 되어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비는 여전히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는 가방 속에서 자신의 우산을 꺼내들었다. 숲을 닮은 짙은 녹색의 우산에서 그의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우산이 없는 나를 위해 그는 선뜻 자신의 우산을 내밀었다. 깜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이미 맞아서 괜찮아요."

"대신 제일 아끼는 우산이니까 다음에 꼭 돌려줘야 해요."

그는 빗속으로 뛰어들어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 그의 향이 선명하게 자리했다.

그리고 우산 위에 반듯하게 적혀져 있는 그의 이름이 보였다. 민.

다 큰 어른이 우산에 이름을 써놓다니. 끝까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음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며칠 후.

토독거리는 빗소리에 우산을 챙겨 나가야지 싶어 집 안에 있는 우산꽂이 앞으로 향했다.

저번에 그가, 아니 민이 빌려준 우산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럽게 우산을 꺼내들자 그의 향기가 코끝 깊숙이 들어왔다. 우산에 그의 향기가 깊게 배어있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아끼는 우산이 맞았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을 열어 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산 빌려줘서 고마워요."

"돌려주려고 하는데 언제 시간 괜찮아요?"


그리고 나는 서둘러 다른 우산을 집어 들었다.

빗물에 그의 향기가 지워지지 않도록.

.

.

.

네가 빌려준 우산에

너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너의 향기가 지워질까 두려워

다른 우산을 집어 들었다.

​​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에 놓여있는 모든 이들에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이 걸어온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