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첫날밤이라 잠을 잘 못 잘 줄 알았더니, 너무 개운하게 11시까지 자버렸다. 잘 잔 건지, 그냥 오래 자서 개운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대충 빵과 야채 그리고 콘프레이크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제스퍼가 오늘 같이 선셋을 보러 가잔다. 근데 같이 가자는 게 꼭 사진 때문인 것만 같았다.
“혀니, 나 오늘 Good Photo좀 찍어줄 수 있어?”
아마 매일 인스타에 내 사진을 올리는 걸 보곤 내가 사진에 관심 있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사실 그렇게 내키지만은 않았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뭔가 감성적인 곳에선 항상 혼자 있고 싶다. 그래야만 진짜 감정에 충실할 수 있을 것 만 같아서, 그래서 슬픈 영화는 혼자 봐야 하고, 밤 산책도 혼자 해야 한다)
사실 어제도 나한테 같이 선셋 보러 가자고 그랬었는데, 갑자기 자기 저녁해 먹는다고 혼자가라고 했었던 전과범이었다. 기다려줬건만.
오늘은 내가 좀 더 느긋하게 준비하고 방에 누워있으니 급했나 보다. 한 10분 간격으로 내 이름을 불러댄다. 사실 태국에서 누가 날 찾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해 지는 시간은 6시 반, 우리가 나온 시간은 5시 40분쯤
벌써부터 해가 진다고 28살 제스퍼는 찡찡대기 시작한다.
“혀니, 근데 우리 해변 어디로 가?”, 너무나 당연스럽게 나에게 에스코트를 요청한다.
"제스퍼, 그냥 위쪽으로 올라가자." 이랬더니, "굿? 굿굿?" 이러면서 의심을 품는다.
한참을 구글 지도를 바라보다 나한테 섬의 서쪽인 차웽비치 쪽으로 가자고 했다.
'멍청아, 서쪽 해변에 해지는 게 보이겠냐?' 제스퍼를 잘 타일러서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전날 대장 마크가 나한테 알려준 스폿이 있었기 때문에 곧장 달려갔다.
오토바이를 탈 때 항상 제스퍼가 하는 행동이 있다.
괜히 나를 앞지르면서 환호성 지르기.
이럴 때마다 문득 생각이 든다. 진짜 형이 맞을까? 마치 자식을 데리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싶다. 해가 생각보다 빨리 저물고 있어 가는 길에 있던 조그마 난 해변에서 선셋을 보기로 했다.
도착하자마자, "혀니, 포토 플리즈"
내 핸드폰이 좋은 편이라 내 걸로 부탁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자꾸만 움직여서 원하는 대로 찍히지 않았다.
“제스퍼! 좀 멈춰서 포즈 좀 취해봐”, 그러자 제스퍼는 꽤나 상기된 얼굴로 나한테 이야기한다.
“혀니, 난 자연스러움을 추구해, 여기서 걸어갈 테니까 계속 찍어봐”, 제스퍼가 말했다.
자꾸만 제스퍼는 멀어져만 갔다.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셔터를 누르는 속도보다 제스퍼의 발걸음이 더 빨랐던 것 같다. 나에게 다가와 해맑은 표정으로 “굿굿?” 하며 물어본다.
이윽고 사진을 보더니, 나에게 실망했다는 듯 말한다.
“혀니, 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좀 잘 좀 찍어봐”
“제스퍼, 선셋 때문에 밝게 안 나와, 밝게 찍으려면…”,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려다 그만뒀다. 어차피 다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사진이 맘에 안 들어하는 걸 맘에 들게 해 줄 수 없었다.
“오케이, 고고”, 다시 찍어주는 편이 빠를 것 같아 다시 앞으로 가보라고 제스퍼에게 말했다.
그렇게 똑같은 포즈로 서있으면서 나에겐 더 많은 사진 찍어달라고 했고, 이내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해는 저물어가고 다 지기 전에 나도 찍어야 하는데, 제스퍼 찍어주다 하루가 다 가게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 참다 한마디 했다.
“제스퍼, 넌 나 찍어주지도 않으면서 너만 찍어 달라고 해?, 평소의 웃음기 많던 나의 모습과 달리 약간은 상기되어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조금 당황하더니 나한테 한 마디 한다.
엥? 너는 찍어달라고 안 했잖아
말문이 막혔다. 할 말도 없었다. 어쩌면 맞는 말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뭔가 제스퍼한테 찍어달라고 하기 싫었지만, 괜히 억울해서 나도 찍어달라고 했다. 결국 맘에 안 들어서 셀카봉 세운 건 안 비밀이다.
그럼에도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칠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소한 다툼 정도야 금세 잊혀 버렸다. 빨간 태양이 산너머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쉽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원래 선셋은 그런 놈이다. 태양이 모두 사라져 버린 뒤에 아쉬워할 사람들을 위해 잠시나마 여운을 남긴다. 그리곤 점점 어두워지겠지.
집에 돌아오며 제스퍼랑은 잘 안 맞는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선 책으로, 글로, 인터넷으로 문화 차이가 있겠거니 싶었는데, 직접 와서 부딪혀보니 정말 다른 것 같았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살아야 하는데 참 막막하다.
우리나라에선 부탁하는 건 조심스러워야 하고, 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으면 상대방도 찍어주는 걸 예의처럼 생각한다. 너무나 익숙했던 나머지 요구만 하는 제스퍼가 그냥 밉게만 보였던 건가 싶었다.
근데 웃긴 건 조금 제스퍼가 부러웠다. 눈치 안 보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해보고 싶은 거 다 말한다. 난 절대 제스퍼처럼 살 수 없을 거다. 이미 20년 넘게 몸이 적응해 버린걸.
그래도 조금씩 달라져볼래. 언제까지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랄 순 없잖아.
그리고 제스퍼, 이해해볼게.
왜냐면 너도 20년 넘게 적응해버린 행동일 거잖아.
그게 문화고 차이였을 거니까.
“똑똑똑”
누군가가 내방을 두드린다. “혀니, 나 좀 도와줘” , 역시나 제스퍼였다.
밤 10시 갑자기 또 도와달란다. 뭔가 했더니 머리를 잘라달라고 한다. 살다 살다 여행 오는데 이발기를 들고 온 녀석은 제스퍼가 처음이다. 이쯤 되면 문화 차이가 아니라 그냥 제스퍼가 다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번에 한번 잘라줬는데 한때 군대에서의 이발병이었던 나의 손길을 못 잊고 또 찾아온 건가 싶어 내심 반가웠다.
실수로 빵꾸를 내버렸는데… 모른척하고 이쁘다고 토닥인 뒤에 다시 잘 잘라줬다. 사진을 보여주니 또 환하게 웃으며 땡큐란다.
정말 한 달 동안 애증의 캐릭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제스퍼,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