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부릉부릉’
왠일인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늘이 바로 계약했던 풀빌라에 입주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짐을 챙겨 빌라로 향했다.
자연스레 가장 작은 방을 가지게 된 난, 딱히 불만이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이 한달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영어기피증, 외국인 기피증 모두 나 스스로 내게 달아준 수식어였기에, 부수고 싶어 선택한 이 순간이 생각보다 걱정과 괴로움으로 다가왔기때문이다.
그래도 의식주 중에 두가지는 해결했으니, 이제 눈을 돌릴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곧장 오도방구를 타고 Tesco로 향했다. 카트를 끌고 이리저리 쏘아다니며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음, 닭볶음탕을 해먹을까 아님, 웨스턴느낌으로 브런치를 해먹을까?, 아니야 그래도 뼈속 한국인인데 첫끼는 한식으로 가자’
평소에 그렇게 소원하던 자취life가 시작된 탓인지, 어디선가 알수없는 호르몬이 솟구쳐 행복한 고민들이 시작되었다. 만국공용의 아침 콘푸레이크와 우유, 그리고 빵 등등과 함께 제육볶음의 재료들을 구매했다. 워낙에 요리를 많이 해먹는 탓에 자신있게 재료들을 집어들었다.
나의 요리 신념은 ‘간만 맞으면 뭐든 맛있다’이다. 신념에 따라 없는대로 그냥 시작했다. 먼저, 달궈진 팬에 마늘과 삼겹살을 넣고 달달 볶았다. ‘치이이이이이익’ 연기가 피워오르며 마치 마약하듯 그연기를 맡곤 삼겹살에 김치를 싸먹는 상상으로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삼겹살이 노릇해지면 가지고 있던 모든 야채를 다 넣고 최연석을 빙의해 멋들어지게 소금을 뿌린다.
뒤에서 나의 모습을 본 마크와 제스퍼는 아마 '코리안 그뤠잇 솊'라며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들 궁금해 무슨요리냐고 묻길래, 애국심가득하게 ‘korean traditional crispy fork’ 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하는 모든 건 이들에게 코리아의 모습일 거라 생각해, 당당함과 고풍스러움을 잃지않으려 노력했다. 그 노력과는 달리, 냄비밥이 타버려 탄내가 피어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에선 원래 이렇게 먹어’라며 도망치듯 부엌을 빠져나왔다.
사실 맛은 없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맛있게 먹었다. 탄내나는 밥과 느끼한 돼지고기볶음, 으윽 사실 엄마랑 전화하면서도 괜히 더 맛있는 척을 해버렸다. 괜히 더 잘 있는 척하려고.
집 뒷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걸 보곤 문득, 해지는 걸 보고 싶어 허겁지겁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 여기에 온이상 나에겐 계획이란 건 없다.
그냥 그 순간이 이끄는대로,마음 가는대로 행동할 뿐이다.
조금 늦게 나온 탓에 엑셀을 좀 더 밟으며 부산한 저녁시간의 시장바닥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어 반듯한 도로를 달리며 저 멀리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따스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색으로 하늘을 물들여가며 바뀌는 건 비단 하늘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25살 한창 취업준비할 나이에 어딘지모를 섬의 한 도로에서 떨어져가는 해를 바라보며 달리고있다. 이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뭘 걱정했었는지는 이미 까마득해졌다. 다만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지금 이순간이 다시 찾아오긴 쉽지않을 거라고’
참으려하지않았다. 되려 후회만남을 것 같았으니까.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 뒤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이제야 알겠어. 내가 왜 여행을 이토록 하고싶었는지 말이야. 그냥 오롯이 그 순간을,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거야.
그 순간만큼은 손 끝에있는 감각까지 살아 숨 쉼을 느끼니까.
굳이 불안해 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곤 조금씩 여행의 이유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드라이브 후 빌라로 돌아오니 2층 테라스에선 맥주파티가 한창이었다. 난 하루한병씩 한달동안 마시려 했던 맥주박스는 그들에겐 오늘 하루로 족했나보다. 벌써 빈병이 수두룩했다.
대화가 한국어가 아닌 탓에 조금 더 귀기울여 듣는다. 수능영어처럼이 아니라 얼굴과 표정, 그리고 감정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거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동남아 화장실에 있는 물쏴주는 호스 ‘범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호주와 스코트랜드 사나이인 앤서니, 마크는 아주 박수까지 치며 난리다. 범건을 쓰면 휴지에 하나도 묻어나오는게 없다며 말이다.
근데 우리나라엔 없다고 하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중국도 있고 일본도 있는데 한국이 없다고?! 아마 북한도 범건 쓸걸?” 마크는 참을수없는 장난끼로 북한이야기를 꺼낸다. 그러게, 왜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불현듯 '비데'가 생각났다. 안쓴지 3주만에 까마득해진 걸까. 당당하게 '싸우스코리아는 범건 같은 거 안써, 우린 오토 범건이 있으니깐' 하며 비데를 보여줬다.
다행히 스코트랜드 마크가 써봤는지 이번엔 박수를 넘어 옆에 친구들에게도 널리 전파하기 시작한다. “저스트 푸쉬 버튼, It is done, 심지어 말려도 줘 , 바지내리고 올릴때까지 하는건 버튼누르는 거 밖에 없어!”
한국인, 벨기에, 호주, 스코트랜드 이렇게 각자 모여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겠냐만은, 화장실 문화. 비데하나로 이렇게 대동단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린 밤새 그런이야기로 결국 창비어 한박스를 모조리 비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