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파아란 하늘을 뒤로하고 힘차게 달린다.
‘부아아아아앙’
이어 오토바이 한 대가 해변가에 잠시 정차한다. 그 뒤로 줄지어 오토바이 세대가 나란히 들어온다. “와, 진짜 이쁘다. 혀니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 역시나 제스퍼였다. 마치 친구들과 투닥대는 여행을 하듯 오늘은 모두 함께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마크 왈, "그냥 섬 구석구석 가보자고"
왠지 모를 든든함이 들었다. 대장 마크가 앞서가면 유치원 선생 뒤를 졸졸 따라가듯 앤서니, 나, 제스퍼 순서대로 줄지어 쫓아갔다.
길을 잘못 들어도, 뱅뱅 돌아가도 그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바람을 가르듯 시원하게 도로 위를 질주했고, 어쩔 땐 스쳐 지나가는 조그마한 광경조차 놓치기 아까워 천천히 달리기도 했다. 골목에선 나무 막대기를 가진 아이들이 편을 갈라 먹고 전쟁놀이를 하기도 했고, 길거리 강아지들은 길바닥에 엉겨 붙어 싸움인지도 모를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한참을 달리다,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보이는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와, 바다가 바다색이고 하늘이 하늘색이야’
내가 뱉어놓고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곳엔 자기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 잘 뽐내고 있었다. 마치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서울에선 하늘을 보며 하늘색이라고, 나무를 보며 나무다운 색이라며 감탄한 기억이 없는 듯했다. 모두가 스스로를 감추듯, 그래야만 살아남는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왔듯, 나 또한 그렇게 살아남았다. ‘처절하게 감춰야만 했다.’
싫어도 싫은 내색 없이 가면을 쓰고 나를 가리고, 자꾸만 세상에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낳아갔다. 그땐 괜찮은 줄만 알았지, 아니 그렇게 생각했어야만 하루하루 고된 나의 일상을 위로할 수 있었으니까.
혼자 깊은 푸념에 빠져있을 무렵, 이 역시 깨워주는 건 제스퍼였다. “우리 오토바이 세워놓고 멋있는 사진 찍자”, 뭔가 그 범죄영화에 나올법한, 아니면 허세 가득한 고등학생들이 찍을법한 사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으… 진짜 왜 저래’이라는 얘기를 나도 모르게 뱉으려다 보니 나 빼고 벌써 오토바이 줄을 세워놨더라. "혀니 삼각대 세워놓고 빨리 와", 다들 나를 재촉한다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졸래졸래 삼각대를 세우고 돌아왔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카운트와 동시에 난 웃기 시작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진을 건져내는 나름의 노하우 같은 거다. 내가 웃으니 내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마크가 웃는다.
“찰칵”
그렇게 웃음병이 돌아 아주 밝고 명량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가족사진이 되었다.
앞서가던 마크가 갑자기 돌아오더니 골목길로 쌩 하니 들어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 따라갔는데 정말 영화 같은 모습의 해변이 펼쳐졌다.
이곳저곳 쏘 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 6시, 항상 머리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태양은 어느덧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일몰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해변에 풀썩 눕는 거다. 하루 종일 태양이 달궈놓은 모래알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저물어가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서 오라는 듯 태양은 따사롭게 날 비췄고, 이미 늦어버림을 눈치채곤 서서히 사라져 아쉬운 마음을 하늘에 물들였다. 하늘엔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의 물결이 뒤덮였고 이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태양아 넌, 좋겠다. 네 마음을 표현할 도화지가 하늘같이 넓어서'
“나도 언젠간 너처럼 마음껏 색칠하며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따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다독이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