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후두두두둑, 이윽고 더욱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잠결에도 들릴 만큼 확연하게. 하늘을 뒤덮은 비구름 덕에 여전히 새벽 같은 아침이다. 블라인드 창살로 들어오는 빛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이불부터 촉감이 푸근하지 못하다. 축축해진 공기마저 내 몸을 바닥 아래로 잡아당기듯 늘어진 하루를 시작하였다.
꽤나 쌀쌀해진 날씨에, 그리고 테라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생각보다 무드 있는 탓에 오늘은 따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라테 한 잔이다. 바깥 풍경이 넓직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머금는다. 인스턴트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흐르는 커피향은 습기 가득한 공기와 섞여 더욱 진동한다. 무거운 하루를 시작했음에도 가끔 내리는 비에 한 여름에 즐기는 따듯한 커피 한 잔은 평소완 다른 무드를 만들어낸다.
잔잔하면서도 피아노 소리가 울림을 주는 노래를 슬쩍 틀어 테이블 위에 얹어놓았다.
‘Billie Eilish - I don’t wanna be you anymore’
버터를 가득 바른 토스트 한 입에 계란을 터뜨려 한 입에 넣는다. 가끔 상큼함이 필요할 땐 토마토를 곁들이면 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떨어지는 빗방울과 속도를 맞춰간다.
싼 커피라 그런지 카페인이 흡수되지 못하고 빠져나간 듯하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거나 그렇지 않으면 딱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을 하려 노력하지 않았어.
생각보다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더라고.
갑갑했는지 조금씩 태양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얇게 펼쳐져 있는 구름 사이로 한줄기, 한줄기 그리곤 점차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밝음에 사람들이 이끌리듯 무턱대고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일주일 내내 예정되어 있던 비구름 덕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좀 더 강한 동기가 되었다.
길을 지나다 잠시 멈춰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고, 평소라면 쌩하니 지나쳤을 시장도 잠시 들렀다. 오늘 잠시 멈춘 시간이 2주 후엔 꿈이 되고 소망이 되어버릴 순간이 될 테니깐. 북적이는 시장통에 몸을 부대끼며 비집고 들어갔다.
반찬들과 줄 맞춰 놓인 생선들, 나무 채 잘라온 과일까지 거의 만물상이었다. 어촌의 비린내와 과일 냄새 그리고 시장 바닥의 꾸리 한 냄새가 섞여 이곳 시장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뭔가 좋진 않지만 구수해서 자꾸만 맡게 되는 그런 냄새와 분위기 말이다. 무엇을 사진 않아도 생선가게 앞에서 흥정하고 있는 손님 틈 사이에 고개를 내밀어 둘러보기도 했고, 괜히 말을 걸고 싶어 처음 보는 반찬에 맛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돌고 돌아 내 손에 걸린 봉투 하나. 코코넛 풀빵이다. 아무렴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쉽게 지나칠 순 없나 보다.
오토바이 앞에 잘 걸어두곤 또 어디론가 향한다. 평소에 자주 가던 일몰 포인트를 지나 쭉 들어갔다. 오늘은 왠지 새로워지고 싶은 맘에 길가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우연히 지나다 본 카페, 테라스 밖으론 빨갛게 지고 있는 일몰이 눈에 띄었다.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 평소 같았으면 이마저도 아꼈을법한 커피 한 잔이다. 아무렴 어때, 쓰려고 아끼지 않았을까?
GS25시에서 팔 법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받아 테라스에 자리했다. 발아래로 조촐히 찰싹대는 파도, 덥지도 그다지 춥지도 않은 온도, 저 멀리서 느긋하게 쬐여오는 햇살,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도 그렇다고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딱 적당함, 보통스러움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에 잘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25살 여행자가 더해져 아름다움은 비로소 ‘여행의 조각’이 되었다.
가장 보통스러워서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의 조각’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