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티혀니 May 17. 2020

Ep27. 우리 인생과 오늘 네 모습은 많이 닮아있구나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새벽 3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인지 잠이란 녀석이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조금 뒤척이다 아예 창문을 열어버리곤 떨어지는 빗소리에 집중했다. 굳이 빗소리를 피해 이불 속으로 도망가야 할 이유도, 새벽 3시란 말에 다음날을 걱정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베개 하난 내 등 뒤로 반쯤 걸쳐두고, 나머지 하난 노트북 받침대가 되어준다. 새벽 3시 감성에 비까지 더해진 분위기에 적당한 무드의 노래 하나를 틀어둔다.



‘offonoff-Photograph’


두 눈을 감곤 분위기에 젖어버린다. 코앞까지 찾아온 잠을 구태여 잡지 않은 이유는 이마저도 지나치기 싫은 시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감성 가득 담긴 편지를 쓸 때엔 중요한 포인트 몇 가지가 있다.


1.밤 9시가 넘은 밤, 방에 주황색 등 하나만 켜둔다.

2.잔잔하면서 이 밤의 분위기를 쉽게 넘겨줄 것 같지 않은 노래를 튼다.

3.적당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장 맘에 드는 엽서를 꺼낸다.



자칫하면 감성이 넘치다 못해 화산 폭발 지경에 이르지만 그것마저 어둠이 가져다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더욱 온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그렇게 밤새 글을 적었다.








한참이나 뒤척였다. 아직도 몸이 늘어져있는 걸 보아하니 아직 시간이 이르거나 비가 계속 오고 있는 게 확실하다.



‘타다다다다다닥’,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린다고? 싶을 때 창문을 보니 거센 호스의 물줄기가 창문을 향해 쏘아졌다.



아침마다 내 창문에 물을 쏘아대는 마크 탓에 오늘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향한다. 분명 또 잔소리할게 뻔하다. 잠을 하루 종일 자니 아님 너한테 아침은 없다니 뭐 어머니가 할 법한 그런 잔소리 말이다. 이런 잔소리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웃음이다. 가끔은 멍청하게, 가끔은 호탕하게 웃어재낀다.



이미 에세이 한편을 다 적어 놓은 탓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지만 여유는 두 배였다. 토스트 두 개, 버터 두 조각 그리고 어제 남긴 파스타까지. 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아점 브런치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챙겨먹은 아침점심





하늘이 갤 듯 말 듯 밀당을 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그친 비, 그러나 아직 하늘엔 구름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축축해진 길바닥을 따라 또다시 나섰다. 해질 시간이 다 된 이유였다.



가는 길엔 시장에 들러 지겨울 법도 한 팟타이와 코코넛 풀빵을 집어 들었다. 이곳 시장 팟타이는 벌써 네 번째 방문인데 살가운 어머니 덕에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다음 주에 떠난다니 아쉬운 표정으로 걱정해 주셨다. 조심히 돌아가라고


그러면서 팟타이와 함께 먹을 야채를 한가득 싸주셨다. 원래 두어 개 담아주는데 말이다. 다른 말은 하시지 않았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약간의 미소와 눈 웃음으로 우린 인사를 마친 뒤 각자의 길로 나섰다.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쉽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순간의 감정들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내려놓고 왔다. 자연스레 감정들이 떠나갈 순간이 오면 알아서 희미해질 수 있도록 말이야.






목적지가 없는 나에겐 지도가 따로 필요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태양을 따라 점점 해안가로 나설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달린 후에야 섬의 끄트머리 해안가에 도착했다. 고독할 만큼 조용한 해변에서 현지인들 몇 명만이 자리를 잡고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방해받기도 싫어 조금은 떨어진 바위 위로 올라서 자리를 잡았다.



구름이 가득끼어 태양은 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 팟타이 위에 라임 반쪽을 꽉 쥐어 과즙을 뚝뚝 떨어뜨린다. 그리곤 한 손엔 야채 한 뿌리, 한 손엔 젓가락으로 팟타이를 가득 집어 들곤 모두 입속으로 향했다.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팟타이에 라임의 상큼함이 퍼지면서도 야채의 신선함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면서도 저 멀리 해안선을 바라보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하늘 가득 메운 구름들이 쉽사리 태양을 내어주지 않았다.



풀대기 한 가득 담아주셨다. 이게 또 태국의 정 아닐까


이미 졌는지도 모를 불그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식사를 마쳤다. 그다음은 코코넛 풀빵, 이게 설탕 빵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뿌려준 뒤 입안으로 직행. 달달한 설탕과 코코넛의 향기가 가득 퍼지기 시작하며 난 코코넛 풀빵으로 향하는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었다.



꼭 먹도록 하자. 단돈 800원


한참이나 코코넛 풀빵에 빠져있을 무렵, 강렬한 주황빛의 무언가가 눈앞을 비추기 시작했다. 다 저버린 줄만 알았던 태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 아직은 아니라는 듯 더욱 강렬하게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활활 태워버릴 기세의 나 또한 모든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모든 감각이 저 멀리 바닷가 한곳을 향했다.





어쩌면 잠시나마 주어진 오분 남짓한 시간을 빛내기 위해 태양은 오늘 하루를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여행 내내 이렇게 간절하면서도 뜨거운 노을을 본 적이 없다. 이미 30분 전부터 조금씩 내려올 준비를 하며 여운을 즐기다 잔잔하게 바다 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클라이맥스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길게 조금씩 바뀌어가는 하늘빛을 여유로이 바라볼 뿐.




여행에 들어, 수도 없이 선셋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순간은 강렬한 5분이었다. 다 같은 노을이라고 같진 않구나.




붉게 빛나다 못해 눈이 부시다



구름 속에 가려져 따스한 빛조차 밖으로 내보이지 못한 설움을 알아. 


어떻게든 가려진 틈으로 네 모습을 비추려 조그마한 먹구름 틈 사이를 붉힌 네 노력을 알아. 


이윽고 구름 아래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그 감격을 알아.



우리의 인생과 오늘 네 모습은 참 많이 닮아 있구나.


정말 한 순간에 변해버렸다. 흐리기만 했던 하늘이 빨갛게 변한게.
이전 26화 Ep26. 보통스러움의 미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