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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17. 2020

Ep28. 선행은 다시 돌고 돌아 내게로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밤 새 비가 내리곤 아직도 모자랐는지 아침까지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루 이틀의 비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어주지만, 일주일 내내 우중충한 기운을 내뿜는 날씨에 속절없이 소파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난 지 10분 만에 말이다.




축축해진 날씨와는 달리 까끌까끌한 소파는 생각보다 포근하게 내 몸을 감싸준다. 무기력한 몸과는 달리 식욕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냉장고의 닭 가슴살이 삶아질 동안 전자레인지에 커피물을 데웠다. 점점 바닥이 보이는 커피통에서 남은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바닥까지 빠득빠득 긁어 겨우 새까만 커피가 만들어졌다.



그리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모두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양파 토마토 상추까지, 손 가는 데로 썰어 빵 위에 살포시 올렸다. 얇게 저민 닭 가슴살 위에 냉장고에서 굴러다닌 칠리소스를 한 바퀴 휘두른다. 별 볼일 없을 줄 알았던 샌드위치가 막상 잘나놓으니 팔당 카페에서 파는 브런치 부럽지 않은 비주얼이다.


닭가슴살 샌드위치


나이프나 포크는 필요 없다. 크게 한입 베어 물곤 우유를 듬뿍 타놓은 커피 한 모금이면 축축한 날씨에 꽤나 잘 어울린다. 하루 세 끼를 토스트만 해먹는 호주인 앤서니가 흐뭇하게 바라본다. 지나가던 마크도 한 마디 던진다. “혀니 호주인 다 됐네"


야 이놈들아, 나라가 뭐가 중요해. 맛있으면 장땡이지. 






배도 든든하겠다 다시 향한 곳은 까끌까끌한 소파 안 구석이었다. 아메리칸 셰프에서 나온 파슬리 파스타 영상을 보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에 들었던 어젯밤 덕에 무료한 점심을 달랠 수 있었다. 구석진 소파에 마크와 단둘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곤 주인공의 현란한 요리 솜씨에 군침을 흘렸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파슬리 파스타, 치즈 폭탄의 쿠바 샌드위치, 새카맣게 타버린 겉면과 달리 선 분홍빛을 띤 텍사스 바비큐를 보며 방금 전에 먹었던 샌드위치는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뱃속에서도.


아메리칸 쉐프, 보는도중 다시 배가 고파졌다.


영화 중간에 앤서니 친구 프리다가 집에 들렀다. 2층으로 걸어올라 오더니 몸 뒤에 무언가를 숨긴 채 걸어온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징어 땅콩과자같이 생긴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건넨다. 맛파이 이다. 저번 바비큐 파티 때도 가져온 과일인데 마치 망고스틴 같아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주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선물이라면서 무려 집까지 찾아온 거다.



맛파이, 망고스틴처럼 하얀 과육이 달콤하면서도 시큼하다.


'뭐야…. 왜 그렇게 감동 주고 그래'


알고 보니 정말 이거 하나 가져다주러 빌라에 들린 거였다. 현지인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다 운이 된 태국 코사무이 섬에서 방콕까지 가는 교통 편을 직접 알아봐 주었고, 직접 찾아가 운행하는지 확인해 주었다. 코리아에서 멀리 떨어져온 어느 섬에서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 마음 깊숙한 곳까지 울림이 찾아온다.



작년 어느 날 신촌을 돌아다니다, 호떡 포장마차 앞에서 일본인 두 명을 만났다. 이게 맛있냐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는 관광객. 괜스레 나의 행동이 고단했던 그들의 여행에 조그마한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라며 호떡 두 개를 건넸다. 한국 여행 온 선물이라고 전해주었더니 신촌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리액션과 함께 놀란 표정을 잊지 못한다. 아마 오늘은 그 행복을 내가 전해 받은 듯하다. 잊지 말고 기억해두어, 내가 받은 이 설렘과 따스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주려 한다.



그래야 이 선행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또다시 내가 찾아올 테니깐.


내가 돌려받고 싶다기보단 지구 한바퀴를 돌며 더 많은 감동과 행복이 세계를 돌길 바란다. 하나의 행동이 한명에게, 두명에게, 점점 더 많이







사실 생각보다 맛있었던 기억에 저녁이 되서 또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간단하면서도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계란 반숙을 딱 올려 나이프로 썰때 흘러나오는 노른자를 기대했지만 이미 후라이를 할때부터 깨져버렸고, 샌드위치를 다 만들고 나서야 계란을 빼먹었다는 걸 알았다.



'뭐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라고 가볍게 정신승리를 해준 뒤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저녁을 먹곤 괜히 한바퀴 시장통을 둘러보다 또 발목을 붙잡혔다. 시장에서 파는 찹쌀도넛이다. 한 열두어개에 800원쯤 하니, 지나가다 자주 들릴만 하다.


역시 빼먹고 가지 않았다. 특히 자주 가는 시장에서 파는 코코넛 풀빵은 가장 기본에 착실하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고 깔끔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사실 항상 설탕 한 봉지를 챙겨주시는데, 난 이게 취향저격이다. 디저트는 자고로 달달해야해.



땡큐 앤서니


앤서니가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조지아에서 직접 사온거라는데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모르겠다. 조금 달달한 와인이었지만 밤공기를 서로 나누기엔 충분했다. 우린 알콜이 필요했으니까.


거의 두시간을 소파에 앉아 떠들었던 것 같다. 뭐 그냥 남자들끼리 모이면 하는 얘기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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