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30일간의 정들었던 풀빌라에서 각자의 방향대로 흩어졌다. 30일간의 생활 동안 잘 맞지 않았던 제스퍼는 우리와 떨어져 다른 빌라로 이사를 갔고, 다른 여행지를 위해 좀 더 머무르기로 한 마크와 앤서니는 다른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남은 3일 동안 에어비앤비에 머무르기로 하며, 30일간의 코사무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창밖에 바다가 보이는 덕분에 매일 아침 6시에 부지런히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었고, 머그잔 속의 커피와 온몸을 감싸는 욕조 안의 따듯한 물은 그간의 걱정스러움을 다독이는 듯했다.
떠나기 하루 전날, 살사 선생님 콜롬비아 친구가 갑작스레 비앤비에 방문했다. 오랜만에 보는 터라 아쉬운 마음에 인사하려 다가가니 봉지 하나를 나에게 건넨다.
"뭔데?",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물었다.
“혀니, 내일 떠난다고 해서 집에 들렀어. 오는 길에 타이 친구한테 물어서 요 동네에서 제일 가는 빵 사 온 거야.”
케이크였다. 받고서도 믿기지가 않아 여러 번 물어보았다. 정말 나 때문에 사 온 게 맞냐고 말이다.
이상했다. 어째서 자꾸만 나를 찾아주는 걸까? 한 번도 가까이해본 적 없는 대한민국 국적 외 사람들, 나에겐 부담이고 걱정이었다. 언어라는 장벽이 나와 그들 사이에 단단한 벽을 만들었고 그 답답함이 점점 달라붙어 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 금발 친구가 너 찾더라. 언제 또 호스텔 놀러 오느냐고 말이야”, 앤서니도 웃기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Everyone loves Hyeonny”
머나먼 타지에 나와 누군가가 찾아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뛰는지 모른다. 스스로 만들어버린 벽 사이로 먼저 손을 내어준 여럿 친구들, 그 덕에 난 한 발짝 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벽이라는 게 허상이었는지도 몰라.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낸,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것. 굳이 가슴 깊은 곳의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어. 내 얼굴과 몸짓,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냄새만으로,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레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
케이크 한 조각에 문득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나, 사랑받기에 마땅한 사람이었어. 그 자체만으로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이윽고 코사무이를 떠나야만 하는 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인 덕분에 처음이자 마지막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런 일출.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린 또 갈라지게 된다. 떠나는 이와 남는 이. 남정네들답게 쿨한 헤어짐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준 앤서니는 있는 힘껏 꽉 껴안아주었다. 그리곤 내 귓가에 꽂히는 한 마디. “너랑 여행해서 너무 좋았어”.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앤서니의 어렵던 호주 발음이 귓가에 쏙 들어왔다.
은근한 눈빛으로 정문을 돌아나가는 날 테라스에서 바라봐 주었다. 이른 아침, 오토바이를 타고 차가운 공기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고 마크의 등 뒤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걸 그리워했다. 바다가 펼쳐진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것, 틈나면 호숫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사색에 젖는 것, 괜히 시장에 들러 사 먹었던 코코넛 풀빵도, 엄마처럼 다정하게 걱정해 주던 시장 팟타이 아주머니도 모두 다.
203cm 장신 쿨가이도 헤어짐엔 예외가 없었다. 항구 앞에 도착한 우린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음.. 포옹이라기보단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에게 안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커다랗고 날 포근히 감싸주었으니깐.
평소엔 장난의 끝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도 진지해질 줄 아는 너희들을 좋아한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편지에 한 글자 꾸역꾸역 영어로 적어내어 조그맣게 접어주었을 때 포근히 안아주던 너희들을 좋아한다.
한국은 왜 같은 나이가 아니면 친구가 아닌 거냐고 묻는 너희들, 그래서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는 거냐고 서운해했던 너희들.
여행이 끝이 난 오늘, 지난 2달간의 추억을 뒤적이다 빼곡히 들어찬 우리들의 모습을 마주했다. 풀장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 두 박스를 마신 날, 한국에선 가족끼리 쌈을 싸준 다는 말에 서로 고기쌈을 싸준 날, 장난에 참다못해 영어로 욕 튼 날. 셀 수 없는 추억들.
짧은 영어로 두세 번은 기본으로 물어봐야 이해했던 대화까지, 그런데 벌써부터 아련해지는 걸 보면 친구를 넘어 가족이 되었는지도 몰라.
안녕, 또 보자.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