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일주일 같았다면 믿어지시나요
태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겁을 많이 먹고 가서일까, 더위에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살만했다.
먼저 치앙마이에 다녀오신 전 동료분은 할 게 별로 없어서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하셨다. 좋아하는 초록을 마음껏 보며 먹는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과 커피라니, 두말할 것 없이 퇴사 후 버킷리스트 1순위였고 퇴사 결정 후 편도 티켓을 끊었다.
한 달을 살며 배운 것 세 가지가 있다면
1. 행복하기를 미루지 말 것
2. 사실 친절은 애써야하는 일이라는 것
3. 어찌됐든 인간은, 적어도 나는 오롯이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는 것
여행 기간이 짧지 않다면 구석 구석 걸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뚜벅이 여행에 익숙해져서일까, 길 위에 놓인 그 동네 사람들의 일상 조각들이 소중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약 4주간 머무른 치앙마이에서 숙소를 옮겨다녔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 그 때 가지 뭐, 하고 궁금했던 곳을 슬쩍 미뤄두기도 했던 여행 초반. 그러다보니 지도에 저장해놨던 다른 곳에 가보거나, 더위나 동선 상 다른 곳에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녀와서 좋았다면 또 가도 될 이 긴 일정에 굳이 아껴두고 있나 싶었다. 가보고 싶었던 곳들은 대부분 좋았고 그래서 정말로 또 갔다. 예상치 못한 행복을 발견하는 재미도 물론 있지만, 예상 가능한 행복은 굳이 미뤄둘 필요가 없다. 또 가고 또 누려서 더 행복하면 될 일을.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 비욘 나티코 란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친절은 기본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것 치고 내가 모두에게 친절했던가 하고 돌아보면 그렇지 않아서, 더 친절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가까울 수록 무너지는 마음은 '편해서 그렇다'는 핑계 뒤로 숨는 것 같았다. 긴장이 허물어지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조금 내려놓는다는 것이 친절의 선을 타지 않도록 주의한다.
관광객을 맞이하는 사람도 매번 일관되게 친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관광을 하고 있어 더 예민했던 차에 스쳐가는 순간이 겹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친절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애써야하는 일이라는 것.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우리 모두는 애쓰고 있다.
혼자 여행하면서 서러운 순간도 물론 있었다.
한국에서 참 드물게 보았던 벌레나 도마뱀, 그리고 물리면 퉁퉁 부어오르는 모기보다도. 사람이었다.
낯선 대화에 무서웠던 적도, 의중을 알 수 없어 마음이 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절대 서로 말 걸지 않았을 한국인들과 눈으로 말로 인사도 정보도 나누었고, 지인을 만나 야시장도 주말 마켓도 가고 혼자서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빙수도 먹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의 존재란 그저 고맙고 든든했다. 서러웠던 기억이 조금은 흐릿해질 수 있게 기억 위로 또 다른 기억이 조각 조각 쌓였다. 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생각하며 행복했다.
오롯이 혼자 있기 위해 떠난 여행인데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놀고 있는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며 카톡으로, 전화로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던 마음 덕분에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혼자 있기 때문에 나의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다음 할 일을 찾다가 더 무력해졌던 순간, 긴 여행이니 여유를 가지라고 다독여준 사람들은 바다 건너 한국에 있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력이 높은 태국의 6월은 온 곳이 무지개였다.
퍼레이드는 물론, 치앙마이와 방콕의 쇼핑몰에서는 무지개 장식과 전시를 볼 수 있었고, 시암 센터 나이키에서는 프라이드 관련 로고를 커스터마이징 한 티셔츠를 만들 수도 있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별 기대 없이 떠났다.
한국이 너무 싫어서도 아니었고, 그냥 정말 온전히 혼자 있어보고 싶어서.
커피도 맛있고 인터넷도 잘 된다 하고, 물가도 저렴한데 혼자 다니기에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환경을 한 번 크게 바꿔보고 싶었던 차에 고유명사 같은 '치앙마이 한달살기'에 편승해봤다. 그게 전부다.
기대 없이 떠나왔지만 그래도 일상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어서.
공항에 내리자마자는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도 않는데 웃음이 새어나왔다.
한국과 사뭇 다른 기온과 들어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속에 드라마 속 장면처럼 나 혼자 꿈뻑꿈뻑,
창문 가득히 들어오는 초록색 나무와 처음 들어보는 새 소리, 엄청 큰 개구리 소리와 처음 보는 꽃들.
여유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오는 울적함과 아침 햇살보다 강한 무기력과 싸우기도 여러 번.
여행 중 과장되는 감정에 행복은 금방 휘발되고 속상함은 그렇지도 않아서.
난 여기와서도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지었다가.
그래도 반갑게 마주치는 사람들과 나눈 몇 마디 대화가 그저 고마웠고
같은 하늘 아래, 또 다른 하늘 아래에서도 찾아주는 마음에 어쩌면 살아갈 용기가 다시 생기는 것도 같다.
혼자 여행을 할 때면 늘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
처음 혼자 제주에 갔을 땐 그냥 쉬고 싶었고, 그 다음해 경주에 갔을 때도 목적은 그저 보상이었다.
작년 더 길게 간 제주에서는 꺾인 생의 의지를 완전히 없애고 싶었지만
올해 더 길게 간 태국에서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정말 이 여행 뒤 일상에 여행의 목적이 있었는지.
이제 여행이 끝났고 돌아온 일상에서 확인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