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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Feb 12. 2017

걷다가

혼자가 되었음에 익숙해지고 나서


기억 속에 묻혀있던 어떤 공간을 지나다가 문득 그 날의 경적 소리, 적당한 보폭, 내리쬐는 햇빛, 앞서 걸어가던 그 사람의 머릿결 냄새 같은 것들이 스며들 때가 있다.


몇몇 장면들은 너무 선명해서 그 순간 혼자 걷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공기와 소리, 냄새들이 순식간에 과거로 회귀하는 것 같은 그 기분은 잔향이 긴 향수처럼 내 정신을 어지럽히고 바삐 걸어가던 두 다리를 느슨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천천히 젖어들게 한다.


이것은 어떠한 괴로움 혹은 절대 고독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흐뭇함, 벅차오름과 같이 나의 내면을 풍족하게 채워주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되는데, 그러다가 검정치마의 <Everything>이 이어폰을 통해 흐르면 그 사람의 독특했던 웃음소리와 자주 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보고 싶은 것도 그리운 것도 아니다. 다만 함께 풋풋했던 시간들을 공유했던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길, 또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것에 가까운 정서다. 어떤 때는 옅은 미소가 번지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대개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깊숙이 각인된 추억들이다. 비로소 그 공간을 지나치는 때가 되면, 그 사람 역시 좋았던 혹은 나빴던 기억들을 떠나 함께 한 나날들이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었길 바라면서 느려졌던 걸음을 다시 한번 빠르게 재촉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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