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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Feb 21. 2017

조건

따져서 뭐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내가 시대에 뒤쳐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그리 재고 또 재는데 열중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시적인’ 사랑을 뽐내기 위해 생성된 ‘가식적인’ 이미지는 어느새 ‘진실’마저 삼켜버렸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고 또 미워했는가. 그놈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그저 남들 눈에 ‘그럴 듯 해 보이는’ 허상만 좇고 있는 것 같다. 그럴듯해 보인다는 말은 그 뜻 그대로 실체가 없다는 것 아닌가.


요즘은 누군가를 소개받을 때도 소위 어느 정도 수준의 지적 혹은 경제적 능력을 가졌는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차 혹은 집이 있는지, 적당히 관리된 외모인지를 필수적으로 따진 다음에야 비로소 ‘첫 만남’이 성사된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서 순수와 낭만이 결여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마지막으로 남아있게 되는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과 마침내 나조차도 그러한 기조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익숙해지다 못해 더욱 적극적으로 이 것 저 것을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이 포착될 때면, 그것만큼 슬프고 자조적일 수가 없다. 가벼운 실소처럼 뭔가 아주 중요한 정서가 픽- 하고 갑자기 사라진 것만 같은.


누군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 있다며 소개라도 해줄라치면, ‘그 사람 영화는 좋아하니? 재즈나 힙합은? 여행은? 운동은 하니? 키는 어느 정도야?’ 속사포 랩 하듯 희망사항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다. 더 웃긴 사실은 이 모든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에 받아 본 사진 한 장이 ‘별로다’ 싶으면 어쭙잖게 또 망설여진다는 것. 그러면서 속으로는 ‘나는 정말로 진실한, 그야말로 영혼이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위해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야’ 되뇌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자기 합리화의 덫에 걸려버린다.


몇 번의 ‘가시적인’ 만남을 직접 경험한 이후로는 비로소 어느 정도 불필요한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군가를 만날 때는 ‘겉’으로 ‘안’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통하는 대화를 충분히 나누고 나서야 상대방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짐작’ 정도 해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비로소 ‘조건 따위 개나 줘도 될 것 같이’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기 시작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진심’을 푹 우려내는 것이다. 대체로 그러한 만남은 이별이 찾아오지 않거나 찾아오더라도 아주 늦게 올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내가 지나쳐 간 과거 속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있었을 것인데, 그때도 나는 무언가를 따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스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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