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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Mar 26. 2017

아이들

<칠드런 오브 맨>을 보고 나서


생명의 잉태가 그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것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머지않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영화 속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계관처럼 변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한 가정의 소소한 행복이나 염원에서 그치지 않고 전 인류 차원으로 확대되어 모두가 '차세대의 위대한 시작'쯤으로 그 가치를 격상시켜 취급하는 때가 온다면, 그것은 분명 거대한 절망과도 같다.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미래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다. 맑은 웃음, 순수, 창의, 희망의 부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날을 상상하니, 혀가 바싹 마르는 듯 극도의 건조함이 머리와 가슴속을 꽉 채운다.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끝내 이 세상 최후의 잉태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지켜낸다. 동행 이후 줄곧 수동적 자세를 취하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 임산부임을 인지하고는 돌연 엄숙한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기성세대로서, 또는 정의로움을 미약하게나마 간직하고 있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의 안정적인 정착만이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전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가 처음으로 무서워졌던 것도 이맘때쯤이다. 사실, 결혼이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될 만큼 심각한 사안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고 의견을 밝혀 왔었는데 그 생각이 미숙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겼다. 물론 아이를 갖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가 자유롭게 선택할 부분이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재검토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선택하지 않음으로 인해 아주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더 이상 어떠한 발전도, 희망도, 내일도 기대할 수 없는 네거티브 사회가 형성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단은 곧, 인류의 역사가 과거 속으로 완전히 소멸하게 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비약이라 여기며 밀어내지 말자. 이제는 생명의 잉태를 마냥 개인의 행복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시점에 당도했다.


그것은 여전히 고결한 선택이며 ‘나’를 뛰어넘어 ‘우리의 내일’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가장 이타적인 행위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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