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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Jun 18. 2017

no filter between us


생기와 성찰로 가득한 관계였다.


생기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성찰은 ‘본연의 내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발견하는 연애’를 실현케 하는 존재다. 나는 비로소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여태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관계들에서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되지 못했다. 쏟아지는 매체 속 이미지와 이 사회의 다수가 만들어낸 보편적 통념에 갇혀 스스로 ‘좋은 남자’ 혹은 ‘멋진 남자’의 프레임을 씌웠고 매번 예상 가능한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만 급급했다. 관계 속에서 ‘나’는 사라졌고, 동시에 상대방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무너지는 순간은 크게 긍정과 부정, 두 가지 중 한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발견하는 연애’는 다행히도 전자의 법칙이 적용된다. 프레임에 가려진 개인의 타락한 본성과 탐욕을 드러내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진짜’가 된다. 그리고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사로잡는다. 육체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욕구에 이끌리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입증하는 요소 중 하나다. 섹스는 더럽고 추악한 행위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스스로를 까발리지 못한다. 본능을 숨기기 위해 어설픈 품위와 허례로 포장하여 개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그런 또 한 명의 허우대가 되고 만다.


진정 생기와 성찰이 가득한 연애가 고프다면 내면의 본능과 탐욕에 귀를 갖다 대야 한다. 그것들이 읊조리는 순수한 감정들을 필터링 없이 끄집어낸 다음 상대방에게 모두 쏟아내야 한다. ‘발견하는 연애’는 그 정도에서 완성되진 않는다. 마침내 뒤집어쓴 그 사람이 그 모든 감정과 행위와 생각들을 과감히,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어야 한다. 어떠한 인위적 조정과 노력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개입되는 순간, 관계는 또다시 왜곡되고 가벼워진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정말 잘 맞는다.’는 표현은 적어도 포장지가 삭아버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한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서 '예쁘다고' 평가받는 사랑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과하지 말자. 욕구든, 질투든, 순도 높은 사랑의 감정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숨기지 말고, 꾸미지도 말자. 지질함과 쿨함이 공존하는, 가장 ‘인간다운’ 내가 되어 마찬가지인 상대방을 마주해보자. 그러면 필터가 없는 사랑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존중과 배려와 취향의 공유 역시 자연스레 밑바탕에 깔릴 것이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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