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이것도 참 쉬운 일은 아니다.
생과 사는 한 줄로 이어진 선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죽어가기도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통상 우리는 죽음을 묵과하려는 경향이 있다. 먼 훗날의 일이라 여기며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나 짧고 당장 내일의 행복만을 좇아 살던 것도 잠시,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급히 엄습해온다. 죽음을 부정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태어난 이래 다양한 형체로 변하며 성장해 온 나의 자아와 철학적 이성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다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과 그 속의 사물과 수많은 인간관계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은 꽤나 절망적으로 와 닿는다.
이러한 내면적 절규를 최소화하고 죽음 앞에서 담대해지기 위해선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것을 ‘가까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슬프고도 안타까운 죽음은 ‘생에 대한 미련을 남기는’ 죽음이다. 회한의 정서를 덜어내려면 살아있는 동안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그리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 지향하는 삶과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 위해 삶의 중요한 시기에 선택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 혹은 ‘언제 가장 나다워지는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자아를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정말로, 진지하게, 아주 깊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1년, 2년은 금방이고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10년, 20년도 금방이다.
어느 정도 ‘나’를 파악했다면, 탐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실행에 옮기면 되는데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현재에 온전히 충실하는 것.’ 내가 자의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를 향해 모든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부어 한 톨의 미련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분투해보는 것. 결과적으로 그것의 성사됨과 관련 없이 그렇게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사람의 삶은 이미 진실하고 참된 것으로 간주된다.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유한 속성과 지성적 의식 세계에 근거하여 각기 다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 덕분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체제와 현실에 투쟁 없이 순응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빠삐용의 명대사처럼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볼 수 있다.
‘나’를 알면 잘 죽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누군가는 평생을 탐구하다 마땅한 해답 없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 있다. 본인에게 적합한 진리를 향해 가는 단계들은 때로 무모하고 위험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행복과 깨달음을 선사한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의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이하 크리스)가 생각난다. 혹자는 그의 야생 생존기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어리석은 치기였다며 비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크리스는 ‘나’를 알기 위한 방법으로 알래스카 대자연 속에서의 '무동력 생활'을 선택했고, 자신의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더 없이 달콤하고 유혹적인 자본과 형식적인 관계의 속박을 끊어낸다. 대단한 용기 정도가 아니다. 내 삶을 감싸고 있던 온갖 종류의 안락함을 나는 단칼에 포기할 수 있는가. 물론 그 방식이 다소 극단적이기도 하며 종국에는 또 다른 딜레마적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엉덩이를 떼고 움직였다. 그러니 의자에 앉아 단순히 키보드를 두들기는 행위로 그의 도전을 폄하하는 것은 명백한 실례일 것 같다.
개인에 따라 자신을 찾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직업 혹은 이외의 자기 계발부터 크리스와 같이 대자연 속에서 날 것의 존재가 되는 것 까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선택하여 충분히 투쟁했다면 더 이상 ‘나’라는 존재의 죽음이 그저 완전한 소멸로만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아 있는 누군가 나의 건강한 자아를 기억해줄 것이며 그들 역시 ‘잘 죽기 위해서’ 세상을 있는 힘껏 받아들일 것이다.
삶은 그 정도쯤 버겁고, 부대끼고, 혁명적이어야 살만했던 생이자 비로소 '웰 다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