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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e, from us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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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Aug 13. 2017

조언보다 위로가, 재촉보다 기다림이

오랜만에 <굿 윌 헌팅>을 다시 봤다.


클래식의 반열에 접어들고 있는 이 작품은 다시 한번 내게 묵직한 감동과 정서적 안정을 선물해주었다.


주인공 ‘윌’이 자꾸만 나로 보였다. 사실은 보인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고 인식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윌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특출 난 재능을 지녔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평범함과 훨씬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하지만, 윌이 느끼고 있는 이 사회와 세상에 대한 어떠한 피해의식과 결핍의 감정들, 그로 인해 형성된 비틀린 정체성과 자기기만적 행태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하게 된 자신의 삶과 행복을 포함하여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 많았던 과정, 여러 가지 이유들까지.


윌은 이 시대의 부와 자본을 혐오한다. 그것들이 양산해 낸 계급과 신분, 편중적인 사회 구조를 자신의 불우하고 피학적이었던 성장과정과 연관 지어 하나의 거대한 트라우마로 인식한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오로지 지식의 세계에서만 머물며 수동적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마음을 열게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주는 선생님과 끔찍했던 과거까지도 보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연인, 더 이상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진정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며 ‘어느 날 갑자기 어떠한 작별의 인사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해주는 동네 친구 덕분에, 윌은 추스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감춰뒀던 속마음을 열고, 처음으로 본인을 환자가 아닌 친구로서 대우해 준 선생님을 격하게 껴안는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자신의 가장 비참했던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었던 ‘그녀’에게로 향한다.


사실 윌에 비해서 나는 애초에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주변에 항상 친구들이 많았고, 어느 한 분야에 특출 난 재능은 없었지만 충분한 지식과 마땅히 갖추어야 할 도덕적 관념들을 제 때 체득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윌과 정확히 일치하는 시선을 가진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돈’이다. 돈의 개념과 그것이 작용하는 이 사회의 불편한 원리를 인지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좀처럼 소멸하지 않는 내면의 피해의식을 늘 안고 살았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혹은 위대한 인물이 되지 못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계속해서 발을 잡아당기는 이 종이 쪼가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홀로 어리석은 오판을 내렸다. 그리고 이것들이 창조해 낸 힘의 수직적 관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타의적인 피해를 입는 사회의 약자들과 최빈국들에 대한 이유 모를 연민과 공분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질서를 세우기 위해 도입된 화폐 제도는 이제 반대로 인간을 줄 세우는 용도로 변질되었고, 특정 현상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확해지는 이유 또한 ‘돈’에서 비롯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 정도면 피해의식이 팽배했다고 할 만하다. ‘없이’ 자랐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환경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속단한 것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외면하기 위해 성립할 수 없는 기이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은 분명 '정의로운' 어른이 되고자 하지만 아직은 어딘가 어설프고 불안한 유년의 단면이 투영된 것이었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검함의 표출방식이었다.


치유의 과정 역시 윌과 비슷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힘으로 당장 바꿀 수 없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삶에 작용하는 방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온갖 나쁘고 부정적인 것들만 가득하다고 여겼던 자본주의 사회도,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에 주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진실한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과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또래 친구들, 언제나 내 편이지만 때로는 비판적으로 나의 잘못된 관점과 언행을 바로잡아주는 옆의 그 사람까지.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과 고민, 문제, 갈등, 좌절감을 보유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는, 내가 가장 힘든 사람인 줄 알았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던 소모적인 자기기만은 싹 지워버렸다. 비교를 없애고, 섣부른 평가와 판단을 절제하고, 현재 당장 누릴 수 있는 그만큼의 행복과 여유에 감사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명백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변곡점의 꼭대기는 군 복무 시기였다. 이 때를 기점으로 친구들은 내가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분명 서서히 변화했고 외면에 집착하던 버릇을 버렸다. 어지러운 내면을 바로 잡고 건강한 의식을 심기 위해 정리와 수용을 반복했다.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져 있는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어설픈 조언과 다그침, 재촉하는 식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나도 그러했다고 말해주는 사람과 어떠한 상스러운 말까지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 치열한 세상 속에서 오롯이 빛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경우에만 진실한 자기인식이 시작되는 것 같다. 적어도 경험상 틀린 말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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