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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e, from us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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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Aug 16. 2017

비슷한 사람이 주는 안도감

근 4년 만에 군대 후임 한 명을 만났다.


나이로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형이었는데 같이 복무할 때부터 일찌감치 영화와 콘텐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따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설날을 앞에 두고 마침 부산에 내려온 형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반갑다는 인사를 빠르게 주고받은 뒤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영화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문화 혹은 예술 산업에 몸을 담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나도 모르게 공감의 탄식을 내뱉곤 했다. 형은 확실히 영화를 자신의 업으로 삼은 듯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명문대 중 한 곳의 경영학과에 입학해 충분히 안정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여전히 방황 중이었다. 사실, 방황이라기보다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다만, ‘영화’라는 광범위한 산업 내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있었고,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대화는 다소 무겁고 비관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냥 좋았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간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들을 토해내 듯 줄줄 읊어대다가 어떤 지점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스스로 듣고 있다 보면 누군가 옆에서 ‘괜찮아, 잘 하고 있어’라고 위로해주는 것만 같은 감정적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두세 시간 정도 쉴 틈 없이 떠들다가, 형이 노트북을 꺼내 그동안 극장에서 본 작품 리스트와 관련된 정보들을 정리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얼핏 봐도 900편은 되어 보였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면서 보이는 영화 제목 중 눈에 띄는 것들에 이르렀을 때, 잠시 멈추어 두고 다시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심지어 그 당시 지독한 감기 때문에 목이 따가워 되도록 말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냥 계속 대화하고 싶었다. 대화는, 가장 최근에 봤던 작품 ‘라라 랜드’부터 감독인 ‘드니 빌뇌브’, ‘리들리 스콧’, ‘데이비드 핀쳐’에 머물렀다가 다시 배우인 ‘에단 호크’, ‘알 파치노’, ‘줄리앤 무어’를 지나쳐 결국 좋았던 장면을 설명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형은 나로 인해 좋은 기운을 얻어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간간이 내가 쓰는 영화 리뷰들을 읽으면서 자극도 많이 받는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나의 행보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보람찬 일이다. 동시에, 그동안 남들과 다르게 걸어온 길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이 세상에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조용히 되새기면서 다시금 활력과 자신감을 채우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카테고리화 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씩은 내가 정말 나누고 싶은 대화만 계속할 수 있는 편안한 상대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이 뜻하지 않게 찾아왔을 때는 왠지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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