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엽엽 Jun 01. 2022

오월의 반대말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어떤 문장과 어떤 시구(詩句)는 삶의 일정치를 경험한 후에야 그 진가를 알게 되기도 한다. 내게는 황지우 시인의 시구가 그러했다. 이별사건 후에 집에 있는 물건을 다 내다버리다가 몇 년 전에 노트에 적어두었던 나의 손글씨를 발견했다.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는 이 시구를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적었던 나. 그것은 오월을 경험하기 전의 나였다.


오 월. 나는 지난 1월부터 다가올 오월을 생각했다. 오월에는 너의 생일이 있었다. 우리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서로의 생일인 10일과 30일을 두고 열심히 운명을 끼워맞췄다. 우리는 운명이야. 우리는 필연이야. 우리를 엮어주는 수많은 인연의 끈을 붙잡아 어쩌면 불확실성을 상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절박함 속에서 우리는 많은 약속을 했다. 오월엔 산에 가자. 너의 생일엔 여길 가자. 수백가지의 우리의 약속은 헤어지자는 한 마디에, 그러자는 두 마디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지만.


오월을 지나면서 나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했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아름답게, 나쓰메 소세키를 들어 ‘달이 아름답다’고 날마다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네가 나를 처음부터 기만하고 속였던 거라면 내 폐허가 이렇게 깊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했고, 최선을 다했고, 내게 맞추려고 했고, 그러다가 그 노력에 스스로 지쳤다는 것을 안다. 너의 피로가 너의 변절의 이유였다. 사랑의 변절. 그것이 내가 뼈 아픈 이유다. 인간을 가장 들뜨게 하고 만족하게 만들었다가, 가장 처량하고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의 허무함, 가변성, 무의미가 내 삶에 구멍을 낸다. 폐허는 곧 이 구멍들을 의미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온갖 구멍으로 폐허가 되버린 내 삶의 일부가 나는 황지우의 말처럼 뼈 아프다.


폐허가 된 내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월을 살았다. 살아야 했으므로 나는 십 여년 전 첫 이별을 더듬어 상기했다. 이깟 이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나의 역사를 통해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녹록치 않았다. 스무살 첫 이별에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다. 4년 열애의 갑작스러운 이별에도 난 이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너는 내 인생에 전무후무한 존재였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거대한 너의 존재를 통해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나를 그깟 연애사건에 흔들리는 사람으로 두고 싶지 않은 체면 때문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태연하게 오월을 살았다. 물론 아직도 네가 계속 있었다. 내게 오월은 너였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너를 망령처럼 달고 살았다.

언젠가 너와 함께였던 제주

너의 망령은 내가 의식하지 않는 지점까지 침범해온다. 오월을 지나면서 내게 새로 생긴 버킷 리스트에는 ‘제주 책방지기 되어보기 있다. 두어달 정도 내가 사랑하는 나무와 바다와 하늘과 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리고 서울과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책방지기를 해야겠노라. 새롭고 상쾌한 마음으로 노트에 적었다. 그러나  꿈의 실체가 페이드- 될수록 나는 다시 오월로 돌아온다. 나는 제주도의  동네책방에서 네가 좋아하는 프렙(prep) 노래를 틀어두고 햇살을 맞을 것이다. 언젠가 우연이라도 네가 너의 세계인 제주에 왔다가 내가 있는 책방에 들리진 않을까. 이렇게 실효성 없는 버킷 리스트만 쌓인 오월을 나는 살아냈다.


그러므로 나에게 오월은 너였다. 우리의 30분 간의 이별 전까지는 그랬다. 이제는 내 인생 어디에도 네가 없고, 그래서 이제 내게 오월은 너의 부재(不在). 그래서 오월의 반대말은 다시 네가 된다. 오월이 너였던 시절, 오월의 반대말도 너인 시절. 온통 너인 오월이 내일이면 끝난다. 유월이 되면 너를 페이드-아웃 할 수 있을까. 글쎄, 없을지도 모르지. 너는 내게 영원한 미해결 과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폐허가 된 내 마음의 구멍을 구태여 채울 생각은 없다. 달의 분화구처럼 남겨둔다. 언젠가 다시 달이 아름다울 날을 기대하면서. 오월 삽십이일이 아닌 유월이 시작됨에 희열을 느끼면서.



작가의 이전글 '나사용법'이 가장 필요한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