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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May 06. 2022

개 목줄 좀 해주세요. 한마디에 돌아온 열마디 말

소심한자의 용기가 개 무시 당하던 날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거의 하고 살지 못다. 어디 그뿐이랴, 반드시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누군가와 싸워보지 않아 싸울 줄도 몰랐을뿐더러, 싸움의 전조가 보이면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비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갈등이 커지면 심장이 뛰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몸이 받쳐주지 않으니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리를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싸움을 피해 대충 빠져나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선택해놓고는 앓았다. 꿈속에서 재현된 사건에 울컥하여 잠을 깨고, 꿈에서조차 아무 소리 못하는 병신 같은 내 모습에 분노가 일어 잠을 깼다. 꿈에서라도 한소리 딱. 했어야 했는데, 꿈조차도 내 편이 아니었다.


이 날 역시도 그러했다. 부글부글 울컥하고 올라오는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글을 쓰며 나의 빌어먹을 소심함을 마주한다. 글로 쓰다 보니 더 명확히 보이는 경우 없는 상대의 태도 따위에 온 용기를 끌어내어 말한 나의 진심이 비참하리만큼 초라해져 가슴을 탕탕 친다.


찬란한 오월의 오후, 해가 길게 드러나는 놀이터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략 육십 대쯤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그 옆을 걷고 있었다. 강아지는 목줄이 없었다.

"놀이터 안이라 그런데, 강아지 목줄 해주시면 감사드릴 것 같아요."

밝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부탁을 드린다. 이 말에 혹시라도 상처입지 않도록 정중하게, 상냥하게 부탁을 한다.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강아지가 놀이터로 뛰어 들어가는데 여전히 전혀 목줄을 채울 의지가 없다. 그런 여자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린다. 결국, 가던 길을 돌아 다시 한번 정중하게 부탁을 드려본다.

"놀이터에 아장아장 아가들이 많이 놀고 있는데 목줄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어요."

아까보다 더 공들여서 예의 바르게 말씀드렸다.


곧이어 예상치 못한 다다다가 내게 쏟아진다.

"이 강아지는 노견이고, 물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한다. 이렇게 강아지 유모차 끌고 개 잠시 풀어두고 산책시키는데 그 정도도 내가 매니지 못할 거 같냐. 사람이 좀 알아서 하게 두지를 못하냐.

자기 애도 없는데 왜 너는 놀이터에서 개 목줄 잡나 안 잡나 따라오며 신경 쓰냐.

요즘 젊은 엄마들은 애를 너무 예민하게 키운다. 개가 좀 같이 뛰고 놀아도 개 주인이 알아서 관리하겠지 하고 믿지를 않는다. 코로나로 인해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너무 예민하다. 조금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어찌 될는지." 등등의 이야기였다.


다다다의 중간에 여자는 "사람의 애가 더 소중하다."라고 했다. 내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전부 소중합니다. 선생님의 강아지가 선생님께 소중하듯이요. 목줄을 해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은 생명의 우열을 가리고자 함이 아닌 것을 아시잖아요? 단지, 놀이터 안을 산책시키고 싶으실 때 최소한의 애견인으로서의 도리를 해주셨으면 감사드리겠어요."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도리"라는 단어에서 여자의 눈빛이 흔들림을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눈빛. '나보다 어린것이 나한테 감히!' 어쩌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리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지 소름 끼쳐지도록 끔찍했다. 차라리 나의 눈이 그 눈빛을 캐치하지 않았으면 이보다는 덜 모욕적이었을까?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는 "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는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결국 끝까지 목줄을 하지 않 채 유유히 놀이터 옆 화단에서 개를 놀렸다. 일부러 나를 쳐다보며 가지 않고 천천히 머물면서.


용기를 끌어내 정중하게 부탁을 했던 '개목줄' 은 보란 듯이 '개무시' 당했다. 마음이 상한다. 아무리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부탁한 들, 아무리 정돈된 논리를 갖다 붙인 들, 그 어떤 논리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에 무력감이 들었다.


겉보기가 저렇게나 아름답고 우아해 보이는 어도 편협하게 자신의 주장만 맞다고 들으려 하지 않는구나.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도 자신의 행동을 전혀 살펴보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에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의 여자로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겉모습이 너무 점잖으셨고 아름다우신 어이어서, 그에 합당하게 상대가 부탁하는 정당한 요청을 당연히 들어주실 것이라고 예측했던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어쩌자고 그런 기대를 하였던가? 나의 편견은 왜 이리도 얄팍했던가?


강아지를 사랑하는 애견인들이 주변에 많다. 함께 어우러 살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과 도리를 하며 소중한 생명을 함께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기에 그런 사람들에게서 본 삶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려 애를 쓴다.

"아... 저분께서도 지나가는 누군가가 예의를 차리지 않고 훅 던졌을 줄 모르는 '개 목줄 좀 해!' 이런 말들에 어쩌면 피해의식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 저분께는 저 노견이 얼마나 소중할까. 아주 잠깐이라도 자유를 주며 산책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크셨겠구나."

"아... 저분께는 자신의 개가 물지 않음을 아는 확신과 자신의 개의 행동반경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을 텐데, 어쩌면 내가 그걸 믿어주지 않아 답답하셨겠구나."


그때 그 강아지가 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노견에게 자유로운 산책을 해주고 싶은 마음, 잠시의 자유를 주고 싶은 마음,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의 사람은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싶다.

다만, 여자가 적어도 <놀이터>라는 공간을 염두해주셨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다른 곳이 아닌, 놀이터를 산책시키는 동안만큼은 목줄을 해주셨으면 얼마나 아름다우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오죽하면 예의 바르게 하고자 애쓰는 게 그렇게 쏘아붙이며 다다다~ 이야기하였을까 하는 마음을 달래 보려 혼자 쓰고 혼자 토닥이며 쓴다. 정중하게 부탁한 정당한 한마디에 돌아온 열 마디에 대해서.


나이가 들수록 넓은 시야를 갖고 남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자신이 가진 편협한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춘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애어른'보다 '어른 아이'가 많은 요즘, 혹시나 보일 어른 아이 같은 나의 모습을 반추해 보게 된다. 오늘 일을 타산지석 삼아, 어른 같은 어른으로 장년층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을 마무리한다. 더럽게 소심 자가 온 용기 끌어내어한 말이 개무시당한 어떤 하루의 끝자락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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