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하며 싹트는 새로운 감각

부엌

by 고요

살림도 요리도 빵점인 나라는 전업주부가 야금야금 책을 보고 메모를 쓰고 해도 눈치가 조금 덜 보이는 안전한 공간이 우리 집에 존재한다. 부엌이다. 조리대 옆, 인덕션 옆, 전자레인지를 돌리며 책 몇 장을 읽어도 마음 편한 공간,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의 책상은 김치냉장고 자리가 되었다.


"진짜 알약 같은 거 나오면 좋겠다. 요리 좀 안 하고 살게." 악에 바쳐 이야기하다가도 동글동글한 파프리카를 물로 씻으면 이내 마음이 풀린다. 땅에서 난 것에 붙은 흙을 닦아내면서 위로를 받는다. 씻으며 음식을 준비를 하는 이 과정이 "더럽게도 싫은 행위"에서 "나를 위로하고 겸손하게 하는 의식"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전자였는데 나도 인식하지 못한 채 후자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엌의 애증을 고스란히 담아, 증오만 남겨두기 뭐하여 곳곳에 메모지를 걸어두고 비치해두었다. 펜은 번지니 늘 연필을 가까이에 둔다. 물기가 튀어 울렁이고 음식이 내는 즙들로 얼룩진 메모지에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이 가득 적혀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버려지는 글감들은 그렇게 매일매일 메모지에서 글로 옮겨지지 못한 채, 전자레인지 위에 쌓여간다.


보글보글 물이 끓을 시간까지 옆에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도 마음이 편한 자리, 부지런히 왼손으로 뒤집개로 볶아가며 오른손으로는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댈 수 있는 공간, 내게는 그런 마법 같은 공간이 부엌이 되었다. 하나에 집중하면 주변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스포트라이트 하나만 집중하는 멀티에 쥐약인 내가 어떻게든 멀티를 해 내는 곳, 부엌.


전자레인지 하부장에 등을 기대어 다리를 뻗고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아일랜드 식탁에 양팔을 올린 채 허리를 쭈욱 펴며 척추를 늘리는 곳, 아이들의 눈을 피해 잠시 쪼그려 앉아 도둑 독서를 할 수 있는 곳,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메모지를 하마터면 콩나물 봉지와 함께 버릴 뻔해서, 결국 쓰레기통 속에서 찾아와 건져내는 수모를 겪는 곳, 웃음과 울음이 모두 공존하는 곳.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쳤지만, 결국에는 이곳 안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 둘 가지고 오며 멀티의 공간이 되어버린 곳.


시간 차를 두고 릴레이 코로나 확진으로 결국 나 또한 격리가 되었다. 열이 나는데 아프면 안 되었다. 유일하게 내가 나의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에. 유일하게 그동안 쓰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못 쓴 것들을 쓸 수 있는데 말이다. 신랑에게 노트북 하나만 제발 갖다 달라 애원하여 다행히 노트북이 나의 곁에 왔다. 해열제로 열을 눌러가며 혼자만의 시공간을 누리려는 찰나, 아뿔싸! 부엌의 메모지! 요리하는 중에, 설거지 중에, 젖은 손으로 적어둔 글감 메모들이 전자레인지 위에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은 이제 완전히 오롯이 혼자만의 시공간에 있는데, 이번에는 오롯이 쓸 시간에 필요한 날것의 메 모직들이 부엌에 남아버렸다.


허허허.

결국 빼도 박도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속한 곳도, 내가 꿈꾸는 곳도, 내가 편한 곳도 결국 부엌이라고. 빌어먹을 탈출을 꿈꾸던 그 부엌에서 내가 숨 쉬고 있다고.


"엄마, 이것 좀 봐."

"이제 이 그릇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된다? 정말 멋지지 않아?"


설거지를 하며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던 딸아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하기 싫은 것을 하다 보며 어느새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한 지점들을 건너며, 아슬아슬하게 건너던 그 강의 거센 물줄기가 점차 잦아든다. 이제는 기왕 건널 강을 춤추며 소리치며 그렇게 건너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부엌에서 파프리카를 자르다 말고 젖은 손으로 메모를 남겼다.


"재료 씻으며, 음식 하며 싹트는 새로운 감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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