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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Jul 27. 2021

걸으며 사유하며 만난 봄

일상 에세이

하루치의 생존, 하루치의 웃음,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서 먼발치서라도 함께 웃어줄 수 있는 내 안의 여유를 위한, 하루치의 운동.

내게는  예쁜 바디핏을 위해서도,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심지어 당장의 건강을 위해서도가 아닌
그저.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함께 깔깔깔 웃고 싶음은 체력적 여유가, 내가 걷는 모든 이유였다.

에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얼굴 찌푸릴 엄마가 어디 있을까?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질문에, 이제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눈에 휑하니 보이는 이 산책길이 싫었다. 나무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산책 중 만나는 나무들에게 받는 기운과 세월의 내공을 느낄 수 없었다. 걷다 눈물이 흐르더라도 숨을 나무 그늘 하나 없었다.

오랜 세월, 거의 내 생애 전부를 큰 공원 옆에서 지내왔기에, 광대한 풀내음과 세월이 그득한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는 이런 산책길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잘 구획되어 깨끗하게 정비된 인위적인 산책로를 걸으며, 예전의 공원에서 듣던 그 시절 그 노래들을 들으며, 갓 심어진 아기 나무들, 잎조차 거의 없어 그늘을 만들지 못하던 작은 나무들을 다시 만난다.

몇 년 사이 그래도 제법 자라 이제는 그래도 나무가 없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걷다 보니, 아이들이 제 아빠의 통근버스를 기다리며 놀았던 놀이터를 지난다. 코로나로 인해 폐쇄된 황량한 놀이터를 뒤로하고, 주변을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맴돈다. 이제는 그 모습을 보며 함께 미소 지으며 바라볼 수 있으리라! 썩소 말고, 미소로!

둘째랑 매일같이 드나들던 이 길에서, 멈추어 보았던 작은 것들.길가의 개미의 행진, 아주 작은 새싹 하나, 민들레에 붙은 작은 벌레.

민들레 꽃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가 있다. 아들이 보면 분명 한참을 보았을 꽃.

급할 것도 하나 없는데, 왜 그리도 어디로 인가를 향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찾아오는지...

이제 아이들이 없는데도, 얼마든지 훌훌 걸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자리에 멈춰 서서 마음에 담는 봄의 흔적들과 그것과 연관한 아이들 생각에,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걷다 보니,이렇게 봄이 왔는데 이 온 줄도 모르고
어둑한 새벽 6시, 두꺼운 파카를 걸쳐 입고 출근한
신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누리는 호사.이것은 정말 호사가 맞다.

언젠가 어디선가에서 본, 시간이 남아도는 전업주부라는 말에 혼자서 조용히 발끈하긴 했지만, 어쩌면 정말 그러하기에, 이런 것 들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남아 있던 봄의 흔적을 다시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기까지 긴 시간 돌아왔던 세월 끝의 작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에, 함께 볼 가족이 없음이 아쉽고,어쩌면, 함께 볼 가족이 없음이 또 감사하고.오롯이 혼자 누릴 수 있는 호사를, 굳이 또 나누고 싶은 마음에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하지만, 타임스탬프로 봄을 담을 수가 없었다. 먼저 피고, 늦게 피고가 의미가 없는, 봄의 섭리를 어찌 시간이 박혀있는 앱을 통해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늦게 피는 꽃들에게, 아직 움츠려있는 꽃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쁜 말들을 쏟아내어 주고 왔다.

내 안에 30여 년 넘게 끝까지 믿고 싶어 머물렀던 '늦게 피는 꽃'이란 말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것이 떨어져 가던 날을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응원을 보내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봄이 왔는데, 온 줄도 모른 채, 오늘 하루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신랑에게 오늘 만난 봄을 카톡으로라도 보내주어야겠다 하며..

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거든 한번 산책길에 다시 나가보아야겠다 하며..

10년도 더 되었을까.. 무릎이 해질 만큼 해진 레깅스와 닳디 닳은 운동화와 함께 오늘도 자알~걸었다^^​​

2021년 3월의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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