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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Nov 08. 2022

가면

초단편소설

 민선은 수요일이 싫다. 수요일은 민선의 세 살배기 아들 지욱이의 유일한 활동, '트니트니'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트니트니는 문화센터에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하는 체육 프로그램 중 하나다. 지욱이가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며 신이 나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민선은 함께 하는 엄마들의 행동을 참고 견뎌야 했다. 


  민선은 문화센터 내에서 나이가 많은 엄마들 축에 속했다. 다른 엄마들은 결혼식 하객으로 온 것인지 체육수업을 하러 온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의 풀 메이크업과 복장을 하고 있으며, 삼삼오오 이미 그룹을 지어 등록을 하였기에 수업 시간 내내 끼리끼리 수다를 떠느라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줄을 서거나, 규칙을 지키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경우, 선생님이 혼자 일일이 대응하다 지치곤 하셨고, 그럴 때면 선생님은 애절한 눈빛으로  '어머니들, 앉아 계시지 마시고 함께 나와해 주세요. '라고 이야기했다. 민선의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민선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 날은 민선의 아들 지욱이 풀 메이크업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체육수업에 오는 엄마들 그룹의 아이가 먹는 간식에 관심을 가졌다. 

  "엄마, 나도 먹고 싶어." 

 민선은 불편한 마음으로 엄마들 무리에 가서 상냥하게 웃으며 말한다.

  "친구야, 나한테 이 과자가 있는데, 네가 먹는 과자랑 바꿔먹어도 될까? " 


이미 아이의 손에는 많은 과자가 들러 있었기 때문에 나누어주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예쁘게 이야기를 시도해보았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귀찮다는 듯 한번 지욱이를 흘겨보더니 툭. 지욱이 손에 과자를 던지다시피 하여 주었다. 그 모습은 꼭 귀찮은 강아지한테 뼈다귀 하나 주며 "옛다. 먹고 떨어져라." 하는 행위와 흡사해 보였다. 민선은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아이들은 규칙과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고, 엄마들은 자신들끼리 뭘 그리 이야기하는지 아이들의 무질서에 관심이 없었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소음 너머로 민선의 귀에는 다른 누군가의 험담, 유아 수업의 호불호 등이 들어왔다. 아기이지만 FM 스타일인 지욱이는 늘 규칙을 잘 지켰다. 그러나, 지욱이 앞으로 매번 새치기를 하는 다른 아이들이 쏟아졌고, 선생님이 일일이 제지하기에는 지쳤을 무렵, 민선은 이 수업을 계속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 화장실에서 지욱이가 응가를 하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그 엄마? 맨날 옷도 후줄근하게 입는? 아이들끼리 하게 그냥 좀 두지 매번 나가고 그래. 우리도 좀 편하게 있지. 혼자만 모범생 하라 그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다가 오늘은 그 집 아이가 유리의 간식을 탐냈어. 뭐 먹고 싶다니까 주긴 했는데 그거 유기농 약과인데 좀 별로더라.'

'우리 애들 주는 건데 왜 하필 봐서는.' 

말들이 이어진다.


역시나 주기 싫은 것을 억지로 준 기색이 역력하다. 옛다 먹고 떨어져라는 그저 추측이 아니라 실제 그러했던 것이다. 갑자기 민선의 목 뒤 떨 미가 뜨겁다. 지욱이 아직 어려 이 말을 잘 알아듣고 소화하지 못함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한다. 한참이 지나 화장실을 빠져나와 손을 씻으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핀다. 거울에 비친 민선의 질끈 묶은 머리, 화장 끼라곤 없는 얼굴, 무릎이 무릎 모양으로 튀어나온 빛바랜 바지, 그리고 지욱이 누나 때부터 물려받아 타던 오랜 유모차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구질구질해 보였구나.'


쭈글 해진 이마의 주름이 유독 쭈글거려 보인다. 충격인지 슬픔인지 화인지 모를 감정들이 민선 안에서 오르내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욱은 그런 엄마를 보며 환히 웃어 보였다.

그날 밤, 민선은 일기장을 폈다. 그리고 써 내려갔다. 



<일기>


아직도 알딸딸한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

정말 오래간만이다. 이런 충격.


어른이 되어 정말 좋은 점 중 하나는 내가 맺고 싶은 관계만 골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 점 하나만큼은 아, 진짜 나이 먹으니 좋네. 싶었는데, 엄마가 되고 나니, 이제 다시 관계라는 큰 틀 속에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 큰 숙제를 떠안은 것 같다. 다행히 지금까지 만나온 엄마 관계들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비슷하고 잘 맞아서, 크게 관계라는 두 글자에 대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오늘 지욱이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커다란 문화의 충격을 먹고,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동안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모두 비슷한 환경,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육아관, 진한 인간스러움을 가진 엄마들을 만났던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구나. 나는 스스로가 참으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셈이 빠르지 못하고, 둔한 편에 속하기에, 섣부른 편견과 판단은 더욱이 자제하고자 정말 정말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고 워낙 반전 충격이 많은 것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더욱이 그러한데, 그래서일까.


내게는 젊고 이쁜 엄마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이쁘게 꾸미고 다니고, 체력이 받쳐주어 늘 생글생글 웃는 그런 젊음, 내가 갖지 못하는 그 싱싱함이 참 좋아 보였었던 것 같다. 부럽기도 했고. 진한 화장, 화려한 옷차림, 날씬한 몸매, 관리를 아주 열심히 한듯한 예쁘장한 얼굴, 그리고 젊디 젊은 나이의 아리따운 엄마들 무리를 실제 라이프에서도 보게 되었는데. 아, 참 예쁘다, 젊은 엄마는 역시 좋구나라고 순수하게 첫인상 도장을 찍은 나의 순진함이 참 안타깝다.


강사가 여러 번을 아이와 함께 엄마손 잡으라고 이야기를 해도, 강사가 여러 번을 엄마가 안아달라 부탁해도, 강사가 여러 번 아이들에게 제자리로 가라고 해도,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쩌면 신체활동 수업임에도 엄마들이 엉덩이를 떼질 않고 앉아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크나큰 충격과 더불어, 아, 그러하니 저런 치마를 입을 수 있고, 그러하니 풀 메이크업이 가능하구나, 그러하니 구두도 가능하구나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늘 초라한 행색이었었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이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비비고 뽀뽀해주고 싶어서,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고 생얼로 다녔었다. 아이 따라 철퍼덕 앉고, 아이 따라 다다다 뛰고 싶어 늘 낮은 운동화와 바지 차림으로 구질구질하게 다녔었다. 좋은 가방은 마구 내려놓고 신경 쓰기 싫어서 , 아이 간식 챙겨 최대한 가벼이 아이 책 가지, 옷가지, 먹을 가지 싸서 다니는 에코백이 좋았다. 어떨 때는 꾸미고 다니는 엄마들 사이에서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이의 눈빛을 좇아가며, 함께 그 눈빛을 따라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던 시절 들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났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아이 눈높이 맞춰 늘 무릎 꿇고 앉다 보니 무릎에 구멍이 난 바지만도 3벌이 넘었는데.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힘들었지만 보람차고, 빛났던 시간 중 하나였다고 단연코 이야기할 수 있다.


생얼이라, 갖춰 입지 못한 옷차림이라서 부끄러워야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의 꾸밈이 아름답게 비칠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그 꾸밈이 다른 빛으로 빗나가게 보일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당연한 걸 이제야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고, 그 안에서 나만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잘 중심을 잡아 지금까지 그 중심 놓지 않고 잘 왔었는데, 엄마가 되고 나서는 혹시라도 나의 이런 행색 아닌 행색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보지나 않을까, 하는 이상한 우려부터 걱정이 좀 많아졌던 것 같다. 그들이 나를 보던 그 눈빛에 신경 쓰지 말아야지.


어쩌면 좀 늦은 나이에 시작한 육아와 겹쳐진 괜스레 젊음에 대한 동경으로, 예쁘게 꾸밈과 육아가 동시로 이루어짐 참 좋겠다, 하던 이 마음이 반영되어 더 그리 느낀 거겠지.


예쁜 엄마가 되어야지.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쁜 엄마.

나의 아이처럼, 다른 아이들도 같이 보아줄 수 있는 엄마.

그런 예쁜 어른이 되고 싶다.



민선은 자신의 초라함, 낡음이 빛난다고 생각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흉이 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초라함은 아이의 눈빛에서 머문 시간을 대변하고 있음을 안다. 민선의 배낭에는 늘 넉넉한 분량의 간식이 들어있고, 민선은 아이들을 편 갈라 나누지 않는다. 원하는 아이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줄 수 있에 늘 여분을 챙긴다. 하지만, 민선은 똑똑이 기억한다. 엄마들 무리가 지욱에게 보냈던 냉소의 눈빛을. 그 점이 마음에 담겼고, 아팠다. 화장실에서의 대화에서 민선은 모욕을 느꼈고 수치스러웠다. 민선은 그들의 태도 차이가 자신의 겉모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다만, 모욕을 느낀 그 순간만큼은  다음 수업 때부터, 보란 듯이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민선은 대놓고 앞에서 말을 하지 못했다. 민선은 가면을 쓰기로 한다. 이 가면은 별로 좋은 가면이 아니다. 민선이 느낀 모욕에 대한 일종의 대가이고, 타인을 함부로 단정 짓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며, 겉보기로 의해 판단되는 사회에 대한 발악이기도 했다. 그룹 지어 끼리끼리 노는 엄마들에 대한  민선의 냉소이기도 했다. 


민선은 대놓고 가면을 쓴다. 그날 이후, 문화센터에서 자신의 아들 지욱에게 영어로만 이야기했다. 그렇잖아도 지난주 수업 내내 영어로 놀아주는 키즈카페 이야기를 하던 엄마들의 멈칫거리는 시선을 민선은 느낀다. 

'봐? 내가 네가 지난번까지 대놓고 뭐라 하던 그 아줌마야.'

그녀들의 아이들이 민선 앞에 올 때면 영어로 아는 체도 좀 해준다. 그녀들의 눈길이 따라온다. 

'사람 갖고 모욕하는 거 아니야. 차림새 가지고 판단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선생님이 좀 말하면 쫌 들어.'


민선은 속으로 생각한다. 여전히 친절한 웃음을 띠며, 모국어와 외국어에 선호도가 없는 지욱은 이러나저러나 영어로 말하면 대충 추임새를 넣어 대꾸를 하고 그녀들은 지욱이 다가오면 준비해온 간식을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나누어준다. 옛다, 먹고 떨어져라. 하던 태도는 진즉에 사라졌다. 참 간사하다고 민선은 생각한다. 자신과 지욱을 무시하며 자기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던 그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무시하던 그들이 보이는 관심을 한껏 비웃어주며 민선은 속으로 외친다. '왜? 지난번처럼 하지?'


통쾌한 일이다. 동시에 비열한 짓이다. 민선은 안다. 이것은 비열한 행동임을. 사실상 자신도 부끄러워야 함을. 그들은 알까? 자신들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수치를 가져다주었는지를. 그들은 알까? 지금의 민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 후, 들의 태도는 냉소에서 친절로 변화했고, 민선은 수업 내내 지욱과 아이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해주었으며 환한 웃음과 환대를 얻었다. 여전히 민선은 무릎이 해진 남루한 바지와 질끈 묶은 머리, 안경,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으며 변한 것이라고는 그녀가 쓴 가면, '언어' 하나뿐이었다. 


민선은 생각한다. 

'이제 이곳에 오면 안 되겠구나.'

어떤 가면은 쓰면 괴롭다. 어떤 가면은 말을 할 수 없어 쓰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음이 맞다고 여긴다. 가슴이 답답하다. 결국 민선은 도망간다. 지욱이 그토록 좋아하는 수업을 뒤로하고, 다음 달 문화센터 수업을 등록하지 않는다.


"엄마, 왜 안가?" 

묻는 세 살배기 지욱의 물음에 그저 환히 웃으며 날이 좋아 놀이터에서 놀자고 말해본다. 그런 후에야, 씁쓸한 가면을 벗는다.     

                                         

© Clker-Free-Vector-Image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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