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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Nov 18. 2022

한 시절을 함께 살다 발이 되어 제 역할을 다한 물건

신발장 정리


"현관이랑 식탁 위를 치우면 훨씬 집이 깨끗해 보인대."


주말이면 깨끗이 청소를 하는 신랑이 무심히 지나가는 말을 했다. 칼을 뺀 김에 무엇이라도 베어야겠다며, 나는 당일 주문, 당일 배송 가능한 정리 책을 한 권 주문했다. 그리고는 책에서 발견한 현관 정리법을 큰 소리로 따라 읽으며 다이소를 향했다. 원리는 간단했다. 신발장의 신을 전부 빼서, 버릴 것은 버리고, 신발정리대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수납을 하되 위치를 가족 구성원의 키와 사용빈도를 고려하여 정리하면 되었다.


'별거 아니네.'

정리 초보자는 눈으로 읽은 정리가 만만해 보여 흥이 난다. 그러나, 당장 다이소의 신발정리대 있는 코너 앞에 선 채, 수많은 종류의 정리대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 집 신발장에 필요한 것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다. 첫 난관은 이렇게 찾아왔다. 나는 가장 싸고 무난해 보이는 것을 집어 든다.  너무 많이 샀다가 괜히 맞지 않거나 남으면 곤란하니 샘플로 몇 개만 사본다.


식탁의 의자를 끌고 와 제일 위에 있는 신발까지 신발장 안에 들어있는 모든 신발, 잡동사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다. 와르르. 와르르. 의자 아래에는 이내 수북이 쌓인 신발더미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쪼그려 앉은 채, 아이의 발이 더 이상 맞지 않을 신을 고르고, 결혼 전에 신던 삭은 구두를 골라낸다.


뾱뾱이 신발이 두 개가 있다. 첫째 아이가 한참을 신고 걸음마를 하며 뾱뾱 거렸던 신, 둘째 아이가 신나게 뛰어다녔던 신이 빛바랜 채 남겨져있다. 그 옆에는 곧 나의 발을 따라잡을 법한 첫째 아이의 운동화와 둘째의 축구화가 제각기의 각도로 자유롭게 떨어져 있다.

'언제 이렇게나 컸지?'


아이들의 첫 신발을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본다. 뾱뾱이 소리가 나나 바닥에 쳐보니 이제 기억너머로 아득해진 작은 삐약이 소리가 난다.

"뾱. 뾱. 뾱. 뾱."

머리가 참이나 늦게 자라서 늘 남자아이냐, 여자아이냐를 설명해야 했던 첫째 아이는 이 신을 신고 두 팔을 벌려 날듯이 뒤뚱거리며 신나게 걸어 다녔다. 언덕이 많고 보도블록이 일정하지 않은 오래된 동네에서 자라 참 자주 넘어지기도 했다. 뾱뾱거리다 이내 철썩 넘어지면,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야무지게도 다시 일어났다. 살아 움직이는 오뚝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이는 살아있는 교훈을 매일 같이 선물해 주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기를 쓰곤 했다.


ㅡㅡㅡㅡㅡㅡㅡ


2014.6.13 금, 첫째 아이가 18개월에 쓴


신나게 쫑쫑쫑 가다가,

세게 걸려 파악~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손 털고,

환~하게 다시 웃으며 뛰어가는 딸내미.


똑같이 넘어져도,

웃느냐, 우느냐에 따라

덜 아플 수도, 더 아플 수도 있겠구나.


우리네 인생 살아가며,

신나게 달려가다 넘어지더라도

웃느냐, 우느냐는 결국 내게 달렸다.


작은 태도가 가져다주는 변화!

허허허 웃고 손 털고 일어나 다시 달려가는 이 작은 아이에게서 나는 오늘도 인생을 배운다.

ㅡㅡㅡㅡㅡㅡ


지금 다시 꺼내 본 뾱뾱이 신발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이의 발이 이내 곧 나의 발을 따라잡을 것이다. 이웃들에게 물려받은 축구화는 아직 둘째 아이에게 크다. 가장 윗켠에 신발정리대를 사용해 올려놓으며 나는 언젠가 아이가 이만큼 발이 클 날을 상상한다. 든든하고 멋진 녀석이 되어 축구를 신나게 즐기겠지.


 일곱 살이 된 둘째는 이번에 큰 병원 치료를 앞두고 있다. 힘든 치료 후에 찾아올 건강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희망하며 나는 그 축구화를 만지작거린다. 집중력이 강하고 근성이 있어 공을 놓쳐도 끝까지 좇아 결국 가져오는 둘째는 축구를 꽤나 잘한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축구를 잘하여 둘째와 한 팀이 된 친구들은 늘 환호성을 지른다. 특유의 매력으로 언젠가 진짜 잔디가 깔린 축구장을 재패할 날을 상상해본다. 부디, 건강하게 무탈히 자라서 하고 싶은 축구를 마음껏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아들의 여분의 축구화를 정리한다.


바닥 구석에는 뾰족구두 한 켤레가 떨어져 있다. 지금의 내가 저 구두를 신을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다.

'신자마자 발목이 삐꺽 하는 거 아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 함부로 웃을 수조차 없는 현실, 이미 나는 너무나 운동화에 길들여져 있는 전업주부다. 버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나, 뾰족구두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빛나던 시절의 한편을 신발장 안에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살다 다시 신을 일이 없더라도, 가끔 향수처럼 밀려오는 호시절의 나를 생각하면서 발이라도 한번 넣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신발의 신발은 보트같이 커서 신발정리대로 이층으로 놓자니 신발장 높이에 자꾸만 걸림돌이 되곤 했다. 물욕이 없고 성실하게 물건을 오래 쓰는 신랑의 신은 세월을 보여주었고, 정직하게 발 모양으로 변형된 형태로 주름이 지어있다. 신발을 보고 있자니 신발장 앞에 가만히 선 27개월 첫째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 여기 아빠 신발이에요. 아빠 신발은 여기 있는데, 아빠는 없네. 섭섭해요. 아빠가 보고 싶어요"


혀 짧은 소리로 아빠를 그리워했던 아이, 첫째도 둘째도 여전히 모두 아빠의 퇴근 시간만을 목을 빼고 기다린다. 아빠가 늦게 오는 날은 자동적으로 취침시간이 늦어진다. 나의 오랜 친구인 신랑은 우리 두 아이들이 매일 같이 그리워하는 대상이고, 그 사실에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다.


오늘, 그런 신랑이 회사에서 상을 받아왔다. 올 한 해 열심히 뛰었다고 연구소장이 운동화 주었다 한다. 신발 사이즈를 물어보길래 의아해했던 결과는 그러했다. 때마침 나는 신발장을 정리해 놓았다. 아이들의 발에 맞지 않은 신들을 정리하고 현관이 드디어 사람 사는 공간 같아졌음에 뿌듯해하던 차에 발견한 신랑의 신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주름져있고 발창은 다 닳아 소멸 직전이었다. 닳아 사라진 발창에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흘렸을 노고가 보여 신발을 든 채 경건한 마음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가족 구성원들의 땀과 삶이 담겨있는 신발은 각자의 모양에 맞추어 취향에 맞추어 많이 닳아 수명을 다한다. 낡아서, 발이 커버려서 처분하긴 하지만 한 시절을 잠시 함께 살다 발이 되어 제  역할을 다한 물건이 고마워 나는 잠시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오늘 비워낸 자리에 새로이 신랑의 신발을 넣으며 앞으로 이 신발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릴 아이들을 상상하며.


이제 우리 집 현관은 말끔해졌다. 널브러진 신들이 제자리를 찾고 깨끗하고 맑은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밖에서 열심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온 신발들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웃음이 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신발장을 여러 번 열었다 닫으며 미소 짓는다.

'진작에 할 것을...'

After
Before
우리 아이들의 가장 첫 신발과 지금의 신발
빛나던 시절 한켠의 구두와 신랑의 낡은 운동화
사용한 다이소 물건: 신발정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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