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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Dec 06. 2022

지상 낙원에 간 첫 균열, 한글

교육 단상

  나는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저희 반에서 호 혼자만 아직 한글을 몰라요. 조금씩 집에서도 시켜주면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이 전부 읽고 쓰고 할 때 호가 어려워하니 걱정이 돼서 그래요."

  아이는 일곱 살 시월을 지나고 있었고, 나는 한글에 대한 조금의 조바심조차 없는 부모였다. 이유는, 알아서 글을 읽고 썼던 첫째 아이와 너무 달랐던 둘째는 글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오래오래 머물고 자기 안에 꼭꼭 담아두었다. 활자에 갇히지 않은 그의 세계는 낙원이었다.


  책을 좋아해서 도서관을 보면 뛰어들아가는 첫째와는 달리, 나의 둘째는 책을 피해 뛰어나가 놀이터에서 공을 찼다. 첫째는 책의 문자를 통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상상했으며, 둘째는 자신의 눈과 피부를 통해 아주 작은 바람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여린 잎들의 움직임을 했다. 창밖을 오래도록 응시한 후, 한줄기 깨달음을 나누어주곤 했다.

  "엄마, 나뭇잎들은 참 예쁘다. 바람이 부니까 이리저리 막 움직이며 서로 싸우다가, 이것 봐. 결국엔 이렇게 꼭 서로 안아준다? 얼마나 예뻐?"

  첫째 아이는 인성동화 등을 통해 다툼 후에 화해가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둘째 아이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현상을 오래도록 바라본 후, 그 진리를 자기만의 철학으로 본인의 마음 깊숙이 담았다.


  나는 아이에게 한글을 일찍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읽고 쓰는 것을 보고 다른 아이들과 같다고 안도하거나 다른 아이들보다 느리다고 애태우고 싶지 않았다. 읽는다는 것은 결국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어느 날 우리는 어느 페이지의 낱말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읽는다. 그 순간 신의 일부가 사라져 가고 낙원에 첫 균열이 간다. 그렇게 또 다른 낱말이 이어진다. 온전했던 우주는 이제 이어지는 문장들에 불과하고 백지 속 유실된 땅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 <작은 파티 드레스, p.13>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에서는 낱말을 알아보고 읽는 순간 낙원에 균열이 간다고 표현한다. 나는 그 낙원을 졸업하는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전혀 조급하지 않음은 결국 담임선생님의 조급함이 되었고, 아이의 큰 수술이 끝난 이후 본격적으로 나는 아이에게 한글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또한, 더 미루면 유치원에 민폐가 될까 싶어서였다.

  일곱 살 11월, 아이는 한글을 제대로 접한다. 유치원 일곱 살 아이들을 통틀어 우리 아이 혼자만 한글을 몰랐고, 그런 아이는 대략 이주일만에 거의 모든 글자를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께 또 한번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세상에! 호가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어쩜. 이렇게 써요? 정말... 그러네요. 일 년 전에 배우면 일 년 걸릴 거, 일 년 후에 배우면 한 달이면 된다고, 그리고 일곱 살이 끝날 무렵에는 일주일이면 이렇게 되는 거네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일주일이면 완벽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합쳐져 습득된다. 글을 읽는 첫 경험, 어렴풋한 글자를 더듬으며 형체를 감지하며, 버벅거리던 입술에서 정확히 터져 나오는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둘째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 나 이게 보여."

"엄마, 나 이거 쓸 수 있다?"

  기쁨과도 같고 놀라움과도 같았던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 만족과도 같고 두려움과도 같았던 아이의 눈빛. 형체가 만져질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찾아오는 미치도록 두렵도록 기쁜 경험에서 오는 눈물. 귀한 이슬방울 같았던 그 눈물은 나의 심장에 박혔다.

  기억이 나지 않는 저 너머의 나의 유년 언저리에, 내가 처음으로 활자를 읽어냈을 때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너무나 당연하여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국어 문맹자의 낙원에 나는 아이를 키우며 한번 더 살 수 있었고, 낙원에 난 첫 균열 앞에서 의식이 살아있을 때 겪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저절로 읽고 쓰게 되었던 첫째 아이를 육아할 때 얻지 못했던 전율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참 잘했다. 기다리기를.

참 옳았다. 기다리는 것이.

참 장하다. 전혀 조급하지 않았던 것이.

모두가 조급해질 때, 전혀 조급하지 않았던 나에게 아이가 건네주는 커다란 선물은 이 '첫 경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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