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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Feb 16. 2023

빛나는 유산

머리에 든 것, 가슴에 든 것

백화점 안은 화려했다. 눈과 코가 바빠졌다. 금빛 장식과 환한 조명, 반짝이는 바닥과 특유의 향기. 몇십 년 만에 들어온 곳이라지만 '아, 맞아. 백화점 냄새는 이랬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처음 보는 브랜드, 익숙한 브랜드, 정갈하게 정리된 진열대, 그리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본다. 언제부터 명품관 앞에 사람들이 저렇게 줄을 섰던가?


​  집을 나오기 직전, 르키에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구호물품을 챙겼다. 방한용품으로 보낼 옷가지를 살피며  아이들 옷장과 어른 옷장에서 잘 입을 만한 옷을 빼두었다.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가진 물건들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연재해 앞에서 내가 가진 가방이 명품이고 아니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친정 엄마는 늘 말씀하시곤 하셨다.

"머리에 든 것과 가슴에 든 것은 그 누가 훔쳐갈 수 없는 너만의 안전한 영역이란다!"

강도가 지갑을 뺏어도 머릿속 지식은 훔치지 못하고, 사고로 건강한 신체를 다쳐도 가슴속의 추억은 해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엄청난 브랜드도 내게 오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 보다 훨씬 더한 가치가 많은데, 굳이? 왜? 그 돈으로 얼마나 값진 다른 일을 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브랜드와 관한 취향과 가치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므로 어떠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 나의 소비영역 또한 개인 고유의 범주이므로 판단과 평가를 정중히 사양한다. 다만, 나의 경우는 오랜 시간 소비가 여행과 독서에 많은 부분 할애되었고 이러한 소비에 있어 당당했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해 냈다. 부모가 되어서도 변함없던 부분이 '학'부모가 된 후, 자신이 없어졌다.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꾸미지 않은 외모와 옷가지로 받는 평가가 나 하나면 그만이겠으나, 혹여나로 인해 아이가 받는 평가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25)

오늘 성당의 매일 미사에서 마르코복음의 한 구절이 나왔다. 시력은 단순히 두 눈이 볼 수 있는 사물의 거리를 너머 세상을 살아가며 값진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의미하기도 한다. 겉모습 너머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뚝심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삶은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준다. 세상의 시선으로 찾아진 욕망이 아닌 나 자신을 채우고 채워진 나로 인해 타인을 채울 수 있는 진정한 가치. 사십여 년의 나의 삶에 나를 살게 한 것은 내면을 가득 채운 가치들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삶, 가치를 찾고 만들어 내는 삶, 자신의 가치를 또렷이 볼 수 있는 삶. 이런 마음으로 육아를 한다. 또한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부모님께 받은 유산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고유한 가치를 건네주고 싶다. 오늘도 그러한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환히 웃는다. 낡은 운동화와 무릎이 해져 색이 바랜 청바지, 병원에서 받은 에코백을 멘 나의 모습은 이 백화점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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