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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Dec 25. 2021

나에게 영어란?

내가 나에게 주는 영어 음성편지

나를 돌보는 시간.

나를 돌본다라는 말 자체가 참으로 어색하였다. 아이들을 돌보고,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이토록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여, 나를 돌보는 비중이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적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이나 형편없이 없었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지낸 날들이었다. 내가 나를 형편없을 정도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 여기저기에서 낡은 수도관이 손 쓸새 없이 여기저기 터지듯 터져 나왔다.


일단, 물리적으로 전혀 혼자 있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커다란 장벽 아래에, 그나마 내가 하였던 나를 위한 돌봄은 글쓰기와 운동, 그리고 영어였다. 이것이 제한된 환경에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루트였다. 사실 글쓰기는 팽팽하게 물로 가득 찬 물풍선과 같아, 써내어  빼내지 않고는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마치, 돌봄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다. 그나마, "영어 대화"가 나를 위한 돌봄의 느낌에 더 가깝게 다가왔다.


영어를 외국어로 한국에서 배운 내게, 영어는 늘 '설레고 행복한 기억'을 자극하는 간절한 마법과도 같았다. 유일하게 행복하게 공부의 재미를 찾아 한 과목이기도 하고, 멀티 페르소나를 자극하여 일탈하고 싶을 때 갈아탈 수 있는 쉽고도 고마운 도구였다.


원어민이 아니지만, 영어로 왠 간한 하고 싶은 말들을 전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내게, 영어를 사용할 일이 전혀 없다는 이런 전업주부의 생활들은 나를 퇴행의 길로 인도하였다.


육아의 긴긴 터널 안에서 나는  그나마도 영어로 뭔가를 말하려면 생각이란 것을  한번 한 후에 말을 해야 하는 지경으로 다시 퇴행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마저도 아이들의 영어 수준에 맞춰 아이들의 책에 만족하며, 아이들에게 영어로 말하고 싶어 대화를 구걸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 You be quiet!" "엄마, You speak Korean!". "No English in this room."이었다. 결국, 한국어로 코드 스위칭을 하는 수모를 겪어왔다.


영어란 나의 삶에 있어서 신기한 도구였다. 이는 아무짝에도 튀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시선을 받게 만들어오기도 했다. 나의 허름한 겉보기적 어눌함을 일종의 멋진 감투로 덮어주기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의 아가 시절 종종 문화센터의 수업을 듣곤 하였다. 허름하게 아이와의 돌봄 그 상태로 등장하여 없는 사람처럼 지내다, 아이에게 다정하게 영어로 대화를 해주는 순간, 다른 엄마들은 천천히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있는 지역의 문제있은 것인지, 우연히 내가 만난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영어를 쓰는 곳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못하겠거니, 가정하고 무작정 접근하는 이들에게 한 방 멋지게 날려줄 수 있는 쿨한 도구가 되기도 했고, 내가 불리할 때는 오히려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냥 감투를 써서 나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필요에 의해 이리저리 꺼내 입을 수 있는 일종의 무기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가져가고 싶은 나만의 유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배웠지만, I am a boy, You are a girl의 교과서였지만, 나에게는 늘 하나의 즐거운 과목이자 신기한 도구였던 영어가 조금이라도 내 삶에서 쓰이기를 원했는데.....


이토록이나 단 한 번의 쓰임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그마저도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단념하지 못한 채 미련이 남아 벽에다 대고 혼잣말로 견뎌오던 시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말벗이 없으니, 벽에라도 이야기한다며....


외국 친구들과 조금 더 끈을 이어갈걸.... 첫째 아이가 있었을 때만 해도 연락이 닿았는데, 아이가 둘이 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사치가 되었고, 그렇게 끈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운 지난 끈들을 주섬주섬 잡아 줄줄이 끌어오지만,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닌 줄들.


더 이상 녹슬면 안 될 것 같음에, 나를 작게 만드는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기로 하였다. 괜찮다. 비록, 말할 상대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차곡차곡 쌓아해 주면 되지! 나를 돌보며, 나의 영어도 돌보고, 내가 나에게 해주는 음성편지를 말하며, 들으며, 내가 나에게 주는 새로운 관심과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음에 마음이 설렜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라고 영화를 보는 순간, 이때다 싶어 딸아이의 방에 들어간다. 문을 닫고, 소중한 나에게 오늘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간단하게나마 생각한 후, 보이스 레코드를 켠다. 즉흥 말하기다. 내가 나에게 말하니, 실수나 에러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지길 바라며, (하지만, 이것은 곧, 더 엄격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단은 관대한 모드로 듣기로 한다.) 나에게 말을 하였다.


나에게 주는 영어 음성 편지!

특별하고 행복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여서, 산타할아버지에게 내가 받고 싶은 선물도 이야기하고, 올 한 해 살아오며 기억에 남는 것들도 짚어보며, 오늘의 내게 주는 편지를 쌓았다. 다 마치고, 내일 또 편지할게. 하고 마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났다.


망할! 이 쉬운걸 지금까지 못하고, 고군분투한 나의 한심함에 눈물이 나고, 이 쉬운걸 이렇게나 진심을 담아 하는 것이 이토록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에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아이가 와서 물었다. 엄마 누구랑 말했어? 왜 영어로 말했어? 크리스마스에 엄마는 time 받고 싶댔어? (나는 크리스마스에 글 쓸 시간을 너무너무 받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다.) 아이는 잘은 모르지만 대충 때려잡은 context안에서 자신의 궁금함을 묻는다.


다음에는 프라이버시가 좀 보장된 곳에서 은밀하고 내밀한 나와의 대화도 좀 해봐야겠다고, 결국은 또다시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환경적인 제약"안에 갇혀 글쓰기처럼 시간에 대한 갈증을 가득 안고, 영어로 음성편지를 쓸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테지....


오늘 내가 나에게 해준 말처럼 말이다.

"괜찮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내가 들어줄게. 그러니, 거기 기다리고 있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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