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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Feb 08. 2022

그 해 우리에게 1

굽이진 세월 갈라진 빈틈에 온기가 가득하기를

뒤늦게 <그 해 우리는> 드라마를 보았다. 뒤늦게 그 시절만이 가지는 싱싱함에 취해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풋풋하고 싱그럽던 인생의 한 때! 어른들이 말하는 "참 좋을 때다."라는 말도, "청춘"이라는 말을 왜 항상 당시에는 몰랐을까.


 <그 해 우리는>을 보며 "그 해의 우리"를 생각해본다. 참 어렸고, 참 순수했고, 참 예뻤던 우리였다. 추워 호호 불던 손을 살그머니 잡아 주머니를 함께 쓰던 그 해의 겨울도, 서로에게 더 많은 그늘을 주고 싶어 가진 것으로 그늘을 만들며 걷던 그 해 여름도, 벚꽃잎 두 손 가득 담아 하늘에 뿌려주던 그 해의 봄도,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두 손 꼭 잡고 걷던 그 해의 가을도. 모두 아련해져 희미해진 추억으로 빛바랜 채 남아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탐하지도 않았고 함께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저 행복했던 순수했던 시절.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 교실 복도 끝 언저리에서 나를 기다리던 당시 신랑의 모습, 매달 생리통으로 거의 기절 직전에 다다른 나를 업고 택시를 태워주던 당시 신랑의 모습, 학생회관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깔깔 웃으며 이야기하던 우리의 모습도 시절만큼이나 싱그러웠다.  


공대 C동 앞, 커다란 나무는 우리만의 이름인 상추라고 불렸었고, 나는 상추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신랑이 연구실에서 나오길 기다리곤 했었다. 한번 집중을 시작하면 잘 듣지 못하는 나와 멀티가 잘 되던 신랑은 도서관 코드가 영 맞지 않는다며, 각자의 패턴으로 시험기간을 나곤 했다. 간혹 도서관에서 눈이 마주치면, 노인정이라 불리는 복학생들의 담배연기 자욱한 등나무 아래에서 믹스커피 한 잔을 뽑아먹으며 서로의 시험에 행운을 외쳐주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서로 맞는 공강 시간,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짧은 산책도 어린이대공원 벚꽃길을 누비며 한낮의 데이트를 즐기던 긴 산책도 그저 좋았다. 왠지 모를 일탈 같이 느껴졌던 공강 시간의 영화관은 늘 두근거렸고, 지하철을 타고 슬그머니 떠나는 강변의 유원지는 우리의 작은 여행과도 같았다. 우리의 두 다리로 행복하게 누비던 그곳들은 여전히 청춘들의 발걸음으로 싱그러울까?


쑥스러운 듯 맞잡은 손을 살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추위를 피하던 호주머니 속 안, 함께 바라보던 강가의 물결, 한 걸음씩 발을 맞추며 다니던 모든 길들이 펼쳐진다. 굽이 굽이 지나 온 시간들 이십 년이 더 지나 지긋이 눈을 감고 그 해의 나를 다시 만난다.


그 해의 나는 내 곁에 있는 신랑과 함께 하는 소소한 행복이 영원하길 바랐었고, 우리의 진심이 닿아 감사했었고, 언젠가 먼 미래에는 우리를 닮은 예쁜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 미래의 세계에서 내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였던 너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눈을 뜨고 현실을 본다.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굽이 굽이 흘러가던 세월 안에서 삐걱이며 벌어진 틈새에 우리는 참 많이도 아팠고 울었지만, 눈을 뜨고 보면 여전히 지금의 우리는 그 해의 우리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디테일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갈 길들, 이미 갈라지던 틈새에서 온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지금을 회상하면, 그때 역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었구나, 할 수 있도록.


햇살 가득한 날, 반짝이는 햇빛으로 일렁이는 잔잔한 호숫가에서 가끔씩 머릿속 새치를 찾아 뽑아주면서 100원 내기를 하던 그때의 우리가 보인다. "흰머리 좀 뽑아줘."하고 족집게로 벅벅 뽑다 말고 아이들이 부르면 달려가기 바쁜 지금의 우리가 보인다. 내가 꿈꾸던 삶은 내가 살고 있는 삶인지도 모른다. 세월에 바래고 닳아 조금씩 나오는 틈들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그 틈을 때로 눈 사랑으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감사로 매 만지며 우리의 마음을 담아 채워나가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웠던 우리를 추억하며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나의 첫사랑, 나의 첫 남자 친구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아빠라 부르는 나의 신랑에게, 우리가 함께 한 스물 한 해의 모든 시간들이 꽤 괜찮았다고 이제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해의 너가 찍어준 나, 학생회관 편의점 앞^^


그 해 우리의 사진( 흰 머리 뽑아주면 백원이던 시절의 우리를 사십대에 다시 만나며)


덧: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시즌 2가 나와서 결혼생활 10년간의 과정을 찍는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을까? 상상해보며 혼자 피식 웃는다. 어쩌면 나 역시도, 연애 10년간의 시간과 또 다른 결혼 10년간의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이제는 중년의 시간들의 인생다큐를 찍는다 생각하며, 어떤 시나리오로 굴러갈지 모르지만 내가 잡을 수 있는 순간들을 잡아 반짝이는 삶으로 만들어 내야지 ^^



그 해 우리에게 2


https://brunch.co.kr/@daily-journey/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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