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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Apr 03. 2024

담배보다 위로가 된 한 마디

현재 나는 노담이지만, 잠시 방황할 때 담배를 피우던 적이 있다. 절에 가기 전에 내가 대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마음 맞는 사람을 많이 못 만나 소속감이 없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스산했지만 당시 나는 나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잘 생각해 보니 사람들을 피하는 건 내 마음의 습관 같았다. 그리고 그게 습관이라면 쌓여온 무언가가 있을 거고, 쌓여왔다면 역으로 작용하는 습관을 만들어 대인기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무서운 곳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 가서 일단 부딪쳐 보자, 용기를 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심정으로 2학년 여름 방학 때 학교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국토대장정에 지원했다. 대장정 모토가 '두 번째 사춘기를 걷다.'였는데 그 당시 내게 딱 호소력 있었다. 국토대장정 가기 전에 조를 짜고 조별로 한 명씩 '여성대표(?)' 같은 담당을 정했다. 양성이 동등할 수 있도록 여성주의를 교육받고 조별 내에서 조율하는 역할이었다. 제일 맏언니였던 내가 맡게 됐다.



호랑이 귀엽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었다. '여성주의.' 지금은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내가 이 분야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일단 그때의 나에겐 신박하고 멋지게 들렸다. 어떤 것들이 폭력적인 상황이고, 어떤 언어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대강 느낄 수 있었다. 조별로 18박 19일 걸으면서 딱히 내가 한 일은 없었지만 덕분에 총여학생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국토대장정이 끝나고 학관 앞을 지나다가 총여학생회에서 발간한 잡지를 발견했다. 글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외로움, 소외감 그리고 문제의식을 가진 친구들이 핑크색 문 뒤에 모여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솔직하고 다가오는 글을 적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용기를 내서 핑크색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인연은 참 신기한 것 같다. 사회학과의 페미니즘 수업을 수강신청해서 들어가 내 일화를 얘기했다. 수업이 끝나고 총여학생회 회장이 다가와서 오늘 한번 더 문을 두드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내게 처음으로 서울에 친정 같은 곳이 생겼다.


동아리방도 과방도 가지 못하던 내가 쉬는 시간에 갈 곳이 생겼다. 그리고 나와 다른 나이의, 다른 전공을 하는 처음 보는 친구들이었지만 비슷한 감수성을 갖고 있어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주 세미나를 하고 강의를 듣곤 했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PC(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처음 배운 후로는 말도 조심하게 돼서 학생회 방에서 나는 조용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내게 다가와 준 두 명의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들이 어찌 보면 내 인생을 바꿨다.


처음 내가 마음을 터놓은 친구는 G라고 한다. G는 어색해하는 내 옆에 꼭 붙어서 말을 걸어주고 어디 갈 때도 나를 데리고(?) 다녀줬다. 의지심이 많은 나라서 G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나 자신의 모순, 나 자신에 대한 미움, 그리고 절절한 짝사랑 때문에 종합적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G는 내가 툭 던진 고민을 자기 고민처럼 밤을 새워서 이야기를 들어줬다. 같이 호프집에서 모순적인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맥모닝을 먹고 헤어졌다. 고등학교 이후로 마음을 터 놓은 건 거의 처음이었던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G 덕분에 절에 가게 됐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인도 선재수련' 포스터를 보게 됐다. 인도로 한 달간 봉사를 떠날 활동가를 모집하는 내용이었다. 1학년 때도 사실 지원했던 봉사활동이었다. 최종 면접까지 붙었는데 단체활동이 싫고 더군다나 면접에서 펑펑 운 게 창피해서 결국 가지 않았다. 크게 나를 바꾸고 싶었고 평소에 꼭 국제구호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나는 다시 고민을 했다. 과연 이 단체가 이상한 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제일 문제였다. 내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G가 옆에서 '어, 나 그거 다녀왔어!'라고 말했다. 내가 믿는 친구가 다녀온 곳이라면 최소한 이상한 곳은 아니겠군, 하는 마음으로 다시 지원했다. 그 후로 본의 아니게 백일출가, 3년 행자생활이 줄줄이 이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


이야기가 많이 돌아왔는데, 나는 총여학생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담배를 배웠다. 내 돈을 내고 담배를 산 적은 없다. 친구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때마다 옆에서 몇 개비씩 빌려 피웠다. 총학생회와 여학생회가 같이 있는 학관 건물 앞에서 주로 모여서 피우곤 했다. 그게 멋있어 보였다. 늘 소외감 들게 하는 캠퍼스, 그것도 학관 앞에서 모여서 담배를 피운다? 당시 내게는 세상에 반항하는 것도 같고 쿨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때였다. 이상형이 나타났는데 나보고 1개월만 사귀자고 제안을 했었다. 나는 처음에 거절했다가 다시 붙잡고 그 이상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약같이 힘든 감정 씨름에 자조적으로 '비정규직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담배를 피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매캐하게 타들어가는 것이 속 시원했다. 감정이 고통스러운데 몸을 괴롭히니 괴로움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덜 답답했다.


한참 그러고 다닐 때 F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에게도 길을 걷다가 '비정규직 연애'중이라고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F가 내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힘들지 않아?' 마음이 울렸다. 나조차 직면하지 않았던 내 괴로움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가 알아준 것이 작은 충격이었다. 아, 내가 지금 힘들구나... 담배나 술이 주지 못하는 깊은 공감을 느꼈다.


F의 낮은 한 마디가 큰 울림이 되어 여운이 아직도 있다. 그만큼 깊은 공감은 힘이 센 것 같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G가 내게 갈 길을 보여줬다면, F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음 학기에 절에 들어가게 되면서 몸에 해로운 것으로 나를 괴롭히는 행위는 자연히 끝이 났다. 철도 없고 외로웠던 시절에 뭔가 내 고독을 외현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었고, 또 괴로움을 신체적 고통으로 느끼게 해 더 철저히 괴롭게 해 준 것이 내겐 담배였다. (이 글을 어린 친구들이 본다면 성인이 되고서 따라 하시길...)


총여학생회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한 친구가 '행복은 없어.'라고 말했다. 나는 반문했다. '정말 없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 대답은 명쾌하게 이어지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삶에서 괴로움에 푹 빠져 더 나를 괴롭게 하고 싶은 시기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공감을 나눌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늘 어딘가 행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고 그래서 그걸 찾으러 절에 갔다.


지금도 여러모로 괴롭고 외롭고 짜증 날 때도 많지만, 그 정도와 빈도가 어릴 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담배나 술, 그리고 염세적인 가치관에 머물며 길 위에 멈춰 주저 앉을 수 있다. 그런 순간도 필요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남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해 주는 경청과 공감이 결국 한 사람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걸을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존경한 친구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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