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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Mar 30. 2024

왜 우울이 반짝이나요?

이 브런치북 제목은 '나의 우울이 반짝인다.'이다. 우울이 과연 반짝이는가? 우울할 때는 가당찮은 소리다. 요 며칠 기분이 안 좋았다. 자주 나 스스로가 조금은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안 좋아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을 먹고 있어도 상태가 막 좋아지진 않아서 그냥 울었다. 엄청 진한 눈물이 흐른다. 울다가 우울증 커뮤니티에 들어가 봤다. 나와 비슷한 분들도, 나보다 심각한 분들도 많았다. 읽다 보니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아, 난 심한 것도 아니구나.


남의 불행을 보면서 위로를 얻는 건 저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불행은 ㅡ그것이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ㅡ 삶의 볼륨을 두껍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마냥 피할 것만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인도에서, 아이들

인도 콜카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중 심각한 부상으로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분들이 계신 시설에서 며칠간 봉사를 했다. 부상은 그분들이 겪은 비극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침대 하나하나 마다 비극이 누워있었다. 그중 한 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추측하기로는 염산과 같은 종류가 얼굴에 끼얹어진 듯했다. 얼굴 피부가 없으셨고, 눈과 코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분을 보고 나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이 꽤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불행이 인생에 묻어도 크게 좌절한다. 그만큼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당연히 건강할 것이고, 오래 살 것이고, 무탈하게 지낼 것이라고 가정하고 삶을 스케치한다. 그래서 큰 일을 겪은 분들이 '내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걸 종종 보곤 한다.  


그렇지만 남의 불행이라고 그게 꼭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불행은 평등하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의 특별한 존재나 주인공이 아니고 그저 많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제든지 내게도 차별 없이 불행이 닥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볼 때면 당장 내일이라도 나와 함께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부모님과 다투더라도 그날 안에 반드시 사과를 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내가 뼈저리게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피부가 없는 그분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분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가실까. 살아있는 것이 기쁘실까. 생각하다 보면 숙연해진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분의 얼굴이 생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동전의 양면




우울한 건 참 힘들고 싫은 일이다. 별 근거 없이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쉽게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세상에 누르면 고통 없이 죽는 버튼이 있었다면 나는 벌써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존이 본능인 인간이 본능을 거슬러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 증상인 우울증. 흔하지만 인간을 그만큼 괴롭게 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병이다.


스스로 다짐하려는 의도도 있다. 우울할 때, 이것이 지나고 나면 또 무언가 내게 남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이 시간을 온몸으로 겪어내자고, 나 자신을 격려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나의 우울은 반짝인다.'는 문구를 보면 사실 시니컬해지기도 한다. 반짝이기는 뭐가 반짝여? 그렇지만 동시에 흐린 기억으로 더듬어 본다. 이것은 늘 그렇듯 곧 지나갈 것이고 그러고 나면 또 견디기를 잘했다는 깨달음이 올 것이라고.


심리학적으로도 인지치료라는 게 있다.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는 그것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인지 구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고 본다. 지금은 그 찰나를 내가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아마 내가 우울할 때도 반복적으로 하는 사고 흐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울할 때가 그 습관적인 사고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은 지나고 난 뒤 반짝이는 통찰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


주로 강박적이거나 당위적인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잡념이 없을 때 이런 깨달음은 다가오는 것 같다. 10년 전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을 달고 있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주위가 고요했다. 연등을 달기 위해 철사를 구부리다가 '아, 이렇게 평화롭게 산속에서 빵이나 만들고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큰 깨달음이 왔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게 어느 정도로 내게 컸냐면 어두운 방에 불을 켜듯 마음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엄청난 자유로움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묶어두지 않았구나. 오직 나만이 '사람이 태어났으면 입신양명해야지.' 하는 강한 당위명제로 나를 얽매고 있었구나 알게 됐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내게 강박적인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우울이 있다면 그걸 초래하는 잘못된 인식 구조가 있을 것이고 내가 그걸 알아차린다면 또 한 단계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울은 내게 통찰의 이면이다. 우울 자체는 힘겹지만 그것이 지나간 자리를 잘 살피면 꼭 반짝이는 걸 놓고 간다. 그렇게 나는 내 우울마저도 긍정하고 싶다. 내게 주어진 것을 모두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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