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낫태!
6월 17일에 시작한 그림 수첩의 마지막 장을 9월 22일에 채워 넣었습니다. 무려 3개월이 넘게 걸린 긴 시간 동안 고작 80페이지를 채우는 대단하고 숭고한 게으름이 있었기에 한 권의 스케치북이 제 역할을 하고 책장으로 이동합니다.
예전에 게으름도 병이라는 글을 썼지만 아직도 그 병은 이등병의 관등성명처럼 몸에 각인된 상태라 고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다가 늙어 죽겠죠. 게을러서 죽음도 미루고 미룰수 있다면 무척이나 괜찮아 보입니다.
비싸디 비싼 몰스킨 수첩에 저렇게도 넓은 여백과 빈 종이를 남기고 스케치북을 덮는 게 아깝지만 사실 노트나 스케치북은 마지막 장이 얼마 남지 않은 바로 그때! 뭐랄까 새 스케치북을 뜯거나 새로운 종이에 그리고 싶은 이상하고 묘한 심술이 발동합니다.
이 심술은 점점 마음에서 커지고 커져서 몇 장 남지 않은 종이들에 무척이나도 무성의하고 "나 오늘 정말 그리기 싫어!" 같은 느낌을 풍기는 그림들을 그리도록 조종합니다. 물론 이번 스케치북도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대충대충과 귀찮음의 꽃길이 펼쳐집니다. 그렇게 억지로 끝까지 채워 넣고 새로운 스케치북을 뜯으며 "이번에는 열심히 그려야지!"를 다짐합니다.
새 것에 대한 열망인지 아니면 마지막을 장식하는 프로의식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같은 종이인데 처음과 끝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니.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 열심히라는 자동응답기 같은 다짐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새로운 스케치북을 펼치고 전혀 새롭지 않은 다짐으로 열심히 그려야죠.
2016.09.24
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