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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Aug 28. 2020

어떤 여름

한 시기가 끝나야 비로소 다음이 온다는 말.


예전부터 독서모임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 덕에, 각자 영어 이름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어 이름은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자신'이 되어 주기에 매일을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꽤나 요긴해 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부캐(부 캐릭터)'를 만드는 일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미 자주 쓰는 닉네임이 하나 있지만 영어 이름은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영어 이름은 무엇일까. 모임을 마치고 들어가면 항상 생각해보곤 하던 날들이 있었다.




 오늘은 빗소리는 없지만 한 번씩 부는 간질거리는 바람이 좋은 날. 우리 집 교회 뒤편에 자리한 나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니 문득 머릿속에서 이러한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원래의 나는 여름을 참 싫어했는데 말이야. 신기하지.  지금은 다른 계절보다 뚜렷한 여름이 좋아졌어.






 작년 ‘여름 산책’을 기점으로 내 삶과 취향은 바뀌어버렸다. 잘 익어 달고 아찔한 냄새를 풍기던 열매들을 직접 보고 깨달은 것의 기쁨을 느낀 탓이 젤 컸으리라. 아니 학생 때는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닐 거라 꿈도 꾸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면허를 따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땀이 날 일이 덜해지니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불편하게 짐을 한가득 안고 택시나 버스를 타러 우왕좌왕하던 어리바리 학생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걸 실감한다. 비록 어릴 때와 반대로 무거워진 것도 많은 어른이지만.



 일단 두 달간 만 여름으로 지내기로 했다. 사실 언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날 아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윤달이니까. 갑자기 나를 7월로 소개하기도 뭣하고. 게다가 뭐든 갑자기 변화를 꾀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 브런치와 네이버 블로그 닉네임을 July로 바꾸고, (난 뭐든 바꾸는 것에 익숙하니까) 상태명에 걸 수 있는 음악도 헤이즈의 and july로 바꾸었다. 개인적으로 헤이즈의 음악 색깔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그녀와 접점이 생기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좋다.




Celine, or July.


 처음에는 셀린느라는 이름을 쓰고 싶어 지어 보았지만, 그것은 프랑스어를 배울 기회가 생긴다면 쓰고 싶다며 결정을 조금 미뤄두었다. 내가 워낙 프랑스 영화인 ‘비포(before)’ 시리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전부터 뒤라스와 사강을 읽고 파리 출신 작가들의 작품과 감성을 좋아하기도 했었고, 정수복 작가의 파리 일기를 읽어보고 꿈꾸던 곳도 파리였으니까. 그곳에 가게 되면 꼭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셀린 혹은 셀린느. 하늘.이라는 셀리 스트라는 어원에서 기원한 이름이기도 하다길래 내 마음에 더 쏙 들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셀린느와 비슷하기도 하고. 대스타인 셀린 디온과 이름도 같고. 하하.



오전 (10:00~)


 어제는 휴무였다. 삼성서비스 센터에 가서 기본적인 점검을 받는 동안 탐탐에 들러 책을 읽었다. 오은 시인의 산문집 - ‘다독임’을 꺼내서 40분 동안 반 페이지 이상을 읽었다.  



오은 - 다독임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서도, 한 가정을 꾸린 후 생계를 위해 모험을 포기하는 것의 거룩함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단지 나는 아직 혼자여서 심신이 상대적으로 가벼울 때 딴생각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무모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한 시기가 끝나야 비로소 다음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오은 산문집 - 다독임 中 129p <다음이 있다는 믿음>


(중략) 주변 사람들이 하도 얘기해서 이 게임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멀찌감치 서서 둘이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면 위로 'You Failed'란 문구가 떴다. 한 아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뜻이야?" "실패했다는 거야." 다른 한 아이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워서 나는 둘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패가 무슨 뜻인지 아니?" "다시 한 판 하라는 거예요." 야무지게 답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은 산문집- 다독임 <다시 한 판 하라는 거예요> 32-33p



 나를 다독 거리며 오전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었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오은이라서 가 아니라, 어쩌면 오은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는 사실 저자의 얼굴보다 글을 보고 구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의 얼굴은 곧 글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살까 말까 하다가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두 페이지에 걸친 저 문단 때문이었으니. 세상에, 실패를 다시 한 판 하라는 거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는 건 정말 삶에서 큰 행운이 아닐까.



오후(11;40~ )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집에 가서 쉬는 것을 거부하고 교보문고로 차를 끌고 나왔다. 복잡한 상남동 거리를 간다는 건 여러 번 심사숙고하게 되는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차를 끌고 나서본다. 다행히 무사하게 교보문고까지 와서 책을 읽고, 책을 여러 권 구입하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의자
오늘은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글쓰기
기억
사랑의 기술


 


개인적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시리즈를 읽고 그에게 열광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그가 쓴 내용을 읽고 실망했다가(…….) 소설의 초반부, 표지가 마음에 쏙 들어서 산 작품이라 '기억'이라는 작품이 특히 애착이 강하다. 그래도 2권은 일단 구매 보류, 1권이 재밌으면 살 예정이다.


 책을 사고는, 핫트랙스에 가서 연필세트와 연필깎이를 샀다. 예전에 교보문고 갔을 때는 귀여운 미니 연필깎이와 취향을 저격하는 디자인 연필세트 종류가  다양했는데, 찾았던 것들이 없어져서 굉장히 아쉬웠다. 그때 내가 잃어버린 노란 오리 연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분명히 떨어트린 기억이 없는데왠지 이제 다시는  가질  같아서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대신 귀여운 노랑 오리 샤프를 사기로. 연필을  좋아하지만 샤프도 급할  쓰기 편해서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좋게 발견한 라임색 몰스킨 노트와 좋아하는 카키색 볼펜도 구매. 개인적으로 몰스킨 브랜드의 다이어리를 사랑한다. 속지가 투명해 다음 장에 글이 비치는  단점이긴 하지만. 다이어리의  앞장에는 베르나르의 신작 소설인 기억의 일부 문구를 적어 넣었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 기억 1편 13p 글.


요즘 연일 코로나로 인해 심신이 무거워진다. 시인의 말대로  시기가 끝나야 비로소 다음이 오는 것이겠지 싶다. 코로나 시대라는 무거운  시기가 끝나면, 다음에 훨씬  가벼워진 시기가  것이다. 이렇게 기대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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