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처럼 퍼지는 매운 향, 혀끝에 머무는 오래된 기억
가끔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쓰는 재료들에도, 어쩌다 문득 오래된 이야기 하나쯤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작은 열매 하나가 얼마나 큰 시간을 건너왔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초피도 그랬다.
혀끝을 얼얼하게 만드는 이 독특한 향신료는, 사실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식탁의 매운맛을 책임졌던, 말 그대로 ‘원조 마라’였다.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자라는 초피나무는 매해 5~6월이면 은은한 황록빛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껍질을 말린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초피다.
톡 쏘는 향과 함께 얼얼한 감각을 남기는 이 열매는, 실제로 혀의 통증 수용체를 자극하는 ‘산쇼올’이라는 성분 덕분에, 일종의 마취 같은 짜릿함을 준다. 사천 요리의 마라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지금, 그 맛의 근원이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셈이다.
종종 산초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초피는 확연히 다르다. 열매는 뭉쳐서 열리고, 잎의 톱니도 더 크고 뚜렷하며, 무엇보다 향이 완전히 다르다.
산초가 들기름처럼 고소하고 부드럽다면, 초피는 단번에 코를 찌르는 강렬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매운 향은 특히 생선 요리나 추어탕에서 빛을 발한다.
미꾸라지의 흙내를 잡고 국물의 풍미를 살려주는 초피는, 지금도 추어탕 전문점에서는 빠지지 않는 존재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간 시골 식당에서 뿌연 김 사이로 퍼지던 그 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초피는 단지 향신료에 머물지 않는다. 봄철에만 잠시 맛볼 수 있는 ‘제피나물’은 초피나무의 어린 순으로 만든 별미다.
살짝 데쳐 무쳐 먹으면, 씹을 때마다 상쾌함이 퍼지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그 느낌이 봄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하다. 강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그 강렬함이야말로 초피의 매력이다.
조선 시대의 의서 『동의보감』에서도 초피는 속을 덥히고 통증을 가라앉히며 회충을 없앤다고 전한다. 현대 과학은 이를 뒷받침하듯 초피의 항염·항균 효과를 밝혀냈다. 그러니 예로부터 초피는 단순한 음식 재료를 넘어선,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존재였던 셈이다.
보관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갓 수확한 열매나 순은 밀봉해 냉동하면 향을 오래 지킬 수 있고, 말린 열매는 서늘한 곳에 밀폐 보관한 뒤 요리 직전에 갈아 쓰면 그 향이 한층 살아난다.
다만 자극이 강한 만큼, 위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천천히, 소량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드물게 알레르기 반응이 있을 수도 있으니 몸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추 이전, 우리의 매운맛을 책임졌던 초피는 이제 ‘원조 마라’로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마라 향신료가 세계를 뒤흔드는 지금, 그와 닮은 매운맛을 이미 알고 있었던 우리는 얼마나 흥미로운 맛의 유산을 지닌 민족인가.
잊혀져 가던 초피의 짜릿한 향을 오늘 다시 떠올려 본다.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이, 때론 식탁 위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 오늘은 초피 한 꼬집으로, 옛 매운맛을 다시 느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