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나무라 불리는 ‘고광나무 순’의 향기로운 비밀
이른 봄, 아직 공기 속에 찬기가 남아 있을 때 산길을 걷다 보면, 문득 코끝을 간질이는 상큼한 향에 발걸음이 멈출 때가 있다.
분명 오이밭도, 텃밭도 없는 산속인데 말이다. 그 향기의 주인공은 바로 ‘고광나무’의 어린 순,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오이나무’라 부른다.
이름만 들어도 친근한 이 나무는 봄이면 오이 향이 나는 순을, 초여름이면 눈부시게 흰 꽃을 피워내는, 산이 내어주는 가장 맑은 선물 같은 존재다.
고광나무는 범의귀과에 속하는 낙엽 떨기나무로,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산지에 자생한다. ‘고광(高光)’이라는 이름에는 한여름 밤에도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흰 꽃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단연 봄의 어린 순에서 풍기는 오이 향이다. 그 향은 오이에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한 휘발성 성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나무를 ‘오이나무’, ‘오이순’이라 불러왔다.
흥미롭게도 고광나무는 서양의 ‘필라델푸스(Philadelphus)’ 속 식물과 같은 혈통이다. 서양에서는 이 식물들을 ‘모크 오렌지(Mock Orange)’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종이 오렌지꽃을 닮은 달콤한 향기를 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고광나무는 꽃이 아니라 ‘순’에서 향을 내니, 같은 속에서도 참 독특한 존재다.
고광나무 순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때는 4월에서 5월, 봄의 짧은 한순간뿐이다. 그때의 순은 아직 부드럽고, 향은 가장 진하다. 나는 매년 그 즈음이면 일부러 산길을 찾아간다.
새순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따서 집으로 돌아오면, 냄비에 소금을 조금 넣은 물을 끓이고 순을 살짝 데친다. 10초 남짓, 그 정도면 충분하다.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꼭 짜낸 뒤 들기름 한 방울, 간장 한 숟갈, 다진 마늘과 깨소금을 살짝 더해 조물조물 무쳐낸다. 그러면 입안 가득 오이 향이 퍼지고, 봄의 바람 같은 향긋함이 남는다.
쓴맛이나 떫은맛이 거의 없어 따로 우릴 필요도 없다. 가끔은 된장국에 넣어 끓여보기도 하는데, 국물 속에 은은히 스며드는 그 향이 참 고요하고 따뜻하다. 마치 숲속의 바람을 한 그릇에 담은 듯한 느낌이랄까.
여름이 오면 고광나무는 또 한 번 변신한다. 순백의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며, 그 자체로 훌륭한 관상수가 된다.
예로부터 한방에서는 고광나무의 꽃과 열매를 ‘동북산매화’라 부르며, 신경통이나 근육통을 다스리고 이뇨를 돕는 약재로 쓰기도 했다.
다만 야생에서 고광나무 순을 채취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병꽃나무 순과 헷갈리기 쉽기 때문이다. 고광나무 잎의 뒷면에는 잔털이 가늘게 줄을 따라 나 있고, 병꽃나무는 털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도 고광나무만의 오이 향이 결정적인 차이다. 야생 식물을 만질 때는 늘 그렇듯, 정확히 알고 다루는 것이 첫걸음이다.
지금은 이미 나물철이 지나 버렸지만, 내년 봄 산을 오를 때, 바람 속에서 문득 오이 향이 스쳐온다면 잠시 걸음을 멈춰보자. 그곳 어딘가에서 고광나무가 살짝 인사를 건네고 있을지도 모른다.
봄의 냄새를 품은 그 인사를, 올해는 놓쳤다면 내년엔 꼭 받아보자. 오늘, 그런 약속을 마음속에 살짝 새겨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