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저녁, 입맛을 깨우는 '간장비빔국수' 한 그릇
어느 여름 저녁이었다. 하루 종일 눅눅한 공기에 지쳐버린 몸은 뭔가 거창한 걸 만들 의욕도, 무거운 밥 한 끼를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그럴 땐 찬장 문 하나 열면 만날 수 있는 소박한 재료들로,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한 끼를 만들 수 있다. 소면 한 줌, 간장과 참기름, 그리고 시원하게 매운 청양고추 한두 개면 충분하다.
이름하여 간장비빔국수. 단출한 이름만큼이나 만드는 시간도 단 15분이면 족하다.
이 국수의 비밀은 면발에 있다. 겉은 탱글하고 속은 탄력 있게 살아있는 면을 위해 나는 늘 ‘온도 충격’을 활용한다. 팔팔 끓는 물에 소면을 넣고 하얀 거품이 끓어오를 때쯤 찬물 한 컵을 휙 부어준다.
그 순간 면은 놀라듯 퍼지지 않고 긴장한 채 탄탄한 식감을 유지한다. 이렇게 삶아진 면은 찬물에 몇 번 헹구어 전분기를 빼주는 게 포인트다.
손끝으로 살살 비비며 씻어내면 면발이 서로 들러붙지도 않고, 양념이 고르게 배어드는 준비가 끝난다.
양념은 간단하지만, 비율만큼은 예민하게 지켜야 제맛이 난다. 간장 2, 참기름 1, 설탕 또는 매실청 0.5의 비율은 마치 오래된 기억 속 밥상의 공식처럼 정확하다.
여기에 다진 마늘 약간, 그리고 송송 썬 청양고추를 넣으면 여름 저녁의 지친 입맛도 단번에 살아난다. 비빔국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 알싸함이니, 고추의 양은 기분 따라 조절해도 좋다.
물기 뺀 소면을 양념장에 넣고, 공기를 품듯 가볍게 비벼준다. 이때 면을 너무 세게 누르기보단, 젓가락을 느슨하게 쥐고 부드럽게 섞어야 양념이 가닥가닥 스며든다.
이렇게 완성된 간장비빔국수는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나는 때때로 고명을 얹어 작은 변주를 즐긴다.
아삭한 오이채나 김 가루를 얹으면 식감이 더 풍성해지고, 날이 더워 입맛이 없을 땐 식초를 살짝 넣어 새콤한 풍미를 더하기도 한다.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써도 한결 깊은 고소함이 느껴진다.
이 간단한 한 그릇은, 참 신기하게도 그날의 피로마저 가볍게 해준다. 한 젓가락 먹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두 젓가락 먹고 나면 왠지 모르게 여름이 조금 덜 덥게 느껴진다.
요란한 조리도 필요 없고, 복잡한 재료도 없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는 그 어떤 정찬보다 풍성하다.
오늘 저녁, 찬장 문을 한번 열어보자. 어쩌면 거기엔 이 한여름을 든든하게 견디게 해줄, 작지만 확실한 한 끼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