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 상큼함 속에 숨은 두 얼굴
여름 문턱에 들어서면 유리컵 속에 차갑게 담긴 자몽주스가 유난히 반갑다. 비타민 C와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고, 칼로리와 혈당 지수가 낮아 몸을 가볍게 챙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과일.
하지만 이 상큼한 한 조각이 어떤 이들에겐 약보다 무서운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 몸의 ‘해독 공장’에 있다. 간 속에서 약물을 분해하는 CYP3A4라는 효소는 외부에서 들어온 약 성분을 무해한 형태로 바꾸어 몸 밖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자몽에 들어 있는 ‘푸라노쿠마린’이라는 성분이 이 효소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공장이 멈춰 서면 약이 해독되지 못한 채 혈액 속을 돌고, 처방량 그대로 먹었더라도 체내에선 몇 배의 효과가 나타나버린다.
그 결과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거나, 근육 손상, 심장 박동 이상 같은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히 고혈압 치료제인 칼슘채널차단제나 고지혈증 약인 스타틴 계열은 자몽과 함께 복용했을 때 위험이 크다. 약의 혈중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저혈압 쇼크나 횡문근융해증 같은 심각한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
불안·우울증 치료제, 장기 이식 환자의 면역억제제, 일부 항생제와 항히스타민제도 예외가 아니다.
혹시 ‘그럼 시간차를 두고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몽의 영향은 며칠씩 이어진다. 효소가 다시 만들어지기까지 24시간에서 길게는 3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침에 마신 자몽주스 한 잔이 며칠 뒤 약물 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1989년 한 임상시험에서 혈압약의 쓴맛을 가리려 자몽주스를 썼다가, 약물 농도가 예측 불가능하게 치솟는 사건이 처음 보고됐다.
그렇다고 상큼한 감귤류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오렌지, 귤, 레몬처럼 푸라노쿠마린이 거의 없는 과일을 고르면, 비타민 C와 향긋함은 그대로 즐기면서도 약물 상호작용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자몽은 분명 건강한 과일이지만, 약과 함께할 땐 그 두 얼굴을 알아야 한다. 오늘 식탁에 자몽을 올리기 전, 그리고 새로운 약을 복용하기 전, 의사나 약사에게 한 번 묻는 습관.
그 작은 질문이 약이 독으로 변하는 일을 막아줄 수 있다. 상큼함이 건강으로 이어질지, 위험으로 이어질지는 결국 우리가 얼마나 알고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