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커리어 피봇팅 : 이제 뭐 먹고 (행복하게)살지?

'나는 직장생활에 실패했다' 9화

by 일재미

보통의 사람들은 작은 회사에서 중간 회사, 큰 회사의 순서로 경력의 점핑을 꿈꾼다.

나는 그 반대였는데, 중견 회사(메가스터디)를 그만두고, 아주 작은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때 당시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리라’


작은 회사에선 한 명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나는 직원수 15명 남짓의 회사에서, 회사 전체 매출의 50% 가까이를 책임지며 회사를 먹여 살렸다.

직원 한 명당 7%의 매출만 벌어와도 1인분을 다 한 것인데, 나는 혼자서 7인분 정도를 해낸 것이다.

그렇게 매일 ‘열일’하면서 나는 최소 ‘뱀의 상반신(?)’ 쯤 되었다고 우쭐했던 것 같다.


막상 회사를 나오고 보니, 뱀의 머리는커녕 나는 그냥 ‘뱀의 꼬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회사를 차려서 우두머리가 되지 않는 이상 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꼬리였고, 그 꼬리는 언제든 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꼬리로 살다가 잘릴 거였으면, 용의 꼬리로 사는 편이 시장에서 훨씬 더 높은 몸값을 인정받을 수 있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이미 뱀으로 8년을 살다가 꼬리가 잘리고 난 뒤에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뱀이며 용이며 꼬리 타령을 했던 것은, 구직 시장의 현실과 현재 내 상황을 뱀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막상 경력직 구직 시장에 나와보니, 이 시장은 나를 ‘이름도 모르는 중소기업을 8년 다닌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내가 그 작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여러 기업에서 어렵고 힘든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HRD/조직문화 경력직을 뽑는 회사들은 지원 자격이나 우대사항에 ‘100인 이상, 1000인 이상 회사’와 같이 비슷한 규모, 혹은 더 큰 규모의 회사에서 근무했던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나는 이미 조직 경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력서 필터링의 대상자였다.

(내가 인사담당자여도 그럴 법한 게, HRD도 HR의 일부이다 보니 큰 조직에서 신문물의 시스템과 제도, 조직문화를 경험했던 사람이 훨씬 더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내가 다닌 회사의 이름을 갈아 낄 순 없으니, 이 바늘구멍을 뚫을 방법은 하나였다.

‘열정! 열정! 열정’

자기소개서와 경력기술서에 이 회사, 이 직무에 대한 집념, 이 산업과 회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가득 담아서 어필하면 1-2개는 서류 합격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 직무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퇴사 후 ‘나’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내가 ‘HRD’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년을 16년처럼 일했는데 뜻이 없다니… 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열심히 일했던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일시적인 현상일 거야. 그냥 지금은 너무 지치고 상처 받아서 그런 걸 거야’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았다.


하지만 내가 33년간 ‘나’로 살아봐서 아는데, 뭐 하나에 꽂혀서 열과 성을 다하고 한번 마음이 뜨면, 그 마음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보는 등의 구직 활동을 하는 것이 소모적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에 기계적으로 해왔던 구직활동을 멈추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할 것인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것인가?'


결정을 하는 데에는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총 세 곳의 회사에서 최종 면접을 봤다.

이 중 두 곳은 내 자의로(?)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유는 하나다.

나는 HRD/조직문화 직무로 구직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이는 내 역량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 열정의 부재에서 비롯된 의심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데, 보통의 HRD 담당자가 하는 일은 현재 내가 열심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력직으로 입사한다는 것은 ‘입사부터 퇴사까지 하나의 직무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으나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한다고 해도 해당 직무로 5년, 10년, 15년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이 업무를 하고 있는 내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내 능력이 너무 아깝다며 왜 천직을 버리냐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일이 천직이었던 것은 과거의 ‘나’ 일뿐이고, 현재의 ‘나’는 더 이상 이 업무에 아무런 의미와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경력을 살려서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한다고 한들, 내가 좋아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5년, 10년, 15년 동안 일할 수 있을까? 그 일을 하는 미래의 나는 행복할까?’

어렵지 않게 ‘NO’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해왔던 동일 직무의 구직활동을 멈추고, ‘커리어 피봇팅’을 결심한다.



‘Pivot(피봇)’의 사전적 정의는 회전하는 물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점을 뜻한다.

흔히 스타트업에서 많이 쓰이는 말인데,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점은 유지하고, 그 외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사업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앞서 내가 면접을 보았던 ‘루닛’은 ‘인공지능’이라는 중심점은 유지하고, 의류 스타트업에서 의료 스타트업으로 피봇 한 케이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튜브’도 ‘영상’이라는 중심점은 유지한 채, ‘영상 데이트 플랫폼’에서 ‘동영상 공유 플랫폼’으로 피봇 한 케이스이다.


‘피봇’의 개념을 개인의 커리어에 적용한 것이 바로 ‘커리어 피봇’이다.

커리어의 중심이 되는 축을 유지한 채 주변부에 변화를 주는 것, 경력의 중요한 한 축은 살리면서 직무를 바꾸는 것을 뜻한다.


나는 33.9세에 ‘커리어 피봇’을 결심했다.

8년의 경력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무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많은 혜택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력을 다 인정받지 못하니 연봉은 낮아질 테고, 새로운 직무에 도전하는 것이니 이직한 회사의 규모가 지금보다 더 작아질 수도 있다.

회사의 HR팀 입장에서도 이력서 첫 장에 적힌 이전 직장/팀 명이 생소하다 보니 자소서를 읽기도 전에 탈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커리어를 피봇 하여 이직한다는 것은 이미 하던 일을 무기 삼아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옮기는 경력직 이직보다 난이도가 높은 과제였다. 의욕적으로 도전했다가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하면, 과거로 회귀하여 이전에 했던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타고난 습성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데, 먹고살겠다고 뜻이 없는 일을 영혼 없이 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보단, 이 도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새로운 시장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동일한 산업/직무에서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과 경쟁해서 최후의 1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왜 하필 수많은 직무 중에 이 직무로 방향을 설정한 것인지, 이전에 했던 일과 성격이 다르지만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고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뚜렷한 명분과 잠재력을 입증해야 했다.

단순히 이 일이 '최근에 유행하는 일'이라서 찔러보는 게 아니라, ‘찐’으로 이 일을 원하고 있고, 이 마음이 진심이라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적극적인 태도로 극복해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나는 ‘찐’으로 거듭나기 위한 성찰의 시간을 계획했다.

이는 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나의 생각을 언어로 정의하는 활동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칫 생각이 길(목적)을 잃고 헤맬 것을 우려하여, 성찰 과정을 세 단계로 구조화했다.


1단계. [나의 발견] 나의 커리어를 분석하고, 커리어의 중심축(Core) 발견
Q. 나의 커리어의 중심축(Core)은 무엇인가?
Q. 왜 이 것이 내 커리어의 ‘코어(Core)’라고 생각했는가?
2단계 [시장의 발견] 커리어의 코어(Core)를 바탕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산업 분석
Q. ‘코어(Core)’의 시장 내 수요는 어떠한가? 증가 추세인가, 감소 추세인가?
Q. 주로 어떤 산업(업계)에서 어떤 포지션을 활발하게 채용하고 있는가?
3단계 [타깃 직무의 발견]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산업/기업/직무의 발견
Q.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산업은 무엇인가?
Q.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비즈니스/기업/직무는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각각의 단계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혹시 '커리어 피봇'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과 예시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정리해보았다.


1단계 [나의 발견] 나의 커리어를 분석하고, 커리어의 중심축(Core) 발견

‘코어(Core)’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중심부, 핵심적인/가장 중요한, 핵심 신조, 가치, 원칙’ 등을 의미한다.

커리어 피봇팅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내 커리어의 중심축, 즉 코어(Core)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 커리어의 ‘코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를 주어야 할 것과 유지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유행만 좇다가 커리어가 꼬이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나는 내 커리어의 ‘코어(Core)’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했던 일을 작은 단위의 업무로 쪼개는 활동을 진행했다.

기존에 HRD 컨설팅 회사에서 내가 해왔던 일은 크게 네 가지로 업무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가지 업무 안에는 약 스무 가지 남짓의 하위 업무가 존재했다.


1. B2B 교육 영업 : 미팅, 제안서 작성, PT 프리젠터
2. 교육과정 기획 : 강사 서치, 강사/담당자 커뮤니케이션, 모듈 구성안 설계
3. 교육과정 콘텐츠 개발 : 인터뷰, 책/문헌 자료수집, 강의안 제작, 교재/매뉴얼 집필, 강사 스크립트(대사) 작성, 동영상 시나리오 구성/대사 작성/촬영 감독 및 검수
4. 강의&교육 운영 : 강의, 교육장 셋팅, 온라인/오프라인 교육 운영, 강의, 만족도 조사, 사후 팔로업


업무를 리스트업 한 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Q. 여러 업무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은 무엇인가?
Q. 남들과 나를 확실하게 차별화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Q.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던 일은 무엇일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코 [교육 콘텐츠 개발]이었다.

대부분의 HRD 컨설팅사 직원들은 교육과정 개발을 하지 않는다.

그저 기업 교육에 필요한 외부 강사를 연결해주고, 외부 강사의 개인기와 콘텐츠를 활용해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학습자들의 정보 습득력이 높아지면서(유튜브의 영향), 강사의 표준화된 교육 콘텐츠로는 고객사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회사에 맞는 교육 과정 콘텐츠를 직접 개발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조직에,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설계하고, 교육 과정 안에 녹여내는 시도를 꾸준히 계속 해왔던 것이다.

이 업무를 ‘과정 개발’이라고 부르는데, 8시간짜리 교육 과정 1개를 개발할 때 수천만 원의 개발비를 받는 프로젝트다 보니, 고객사 담당자의 기대 수준도 높고 업무 강도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너무 재밌고 잘 맞았다.

처음에는 시장의 요구에 의해 시작한 업무였지만, 하면 할수록 흩어진 정보들을 조합하고 연결하여 메시지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에 희열을 느꼈다.

덕분에 몇 년간 쉬지 않고 과정 개발을 했고, 해당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과 레퍼런스를 쌓으며 콘텐츠 개발 역량을 축척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경제적 보상이 없이도 꾸준히 해온 일은 무엇일까?’

질문해보면, 난 언제나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수다쟁이였다.

학창 시절에 받았던 상장은 글짓기, 구연동화, 웅변대회처럼 말하고 글 쓰는 분야가 전부였고, 대학교 때의 스펙도 대학생 기자단, 수기 공모전 등 말과 글을 통해 내 이야기를 전하는 활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평소 취미도 몸을 움직이는 취미보다는, 글을 읽고 쓰거나, 대화를 하는 행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나라는 사람은 내 목소리가 담긴 콘텐츠를 만들어서, 다른 이들의 일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내 커리어의 중심축(Core)은 ‘콘텐츠 개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콘텐츠’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로운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일을 하면서 겪는 현실적 고충이나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단계 [시장의 발견] 커리어의 코어(Core)를 바탕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산업 분석

‘콘텐츠 개발’을 커리어의 코어(Core)로 결정했다면, 다음은 내 ‘코어(Core)’의 시장 가치를 가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이 일이 앞으로도 비전이 있는가?' 확인하는 작업에 해당된다.

나는 헤드헌터나 HR 채용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이와 관련된 정보가 딱히 없었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원티드’ 구인구직 어플을 켰고, ‘콘텐츠’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다양한 기업에서 '콘텐츠'와 관련된 채용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면(예를 들어 1-2년 전보다 현재 다방면에서 ‘콘텐츠’ 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거나, 나와 같은 문과생이 지원할 수 있는 다른 직무에 비해 활발하게 채용이 진행되고 있다면) 회사들이 이 사업에 대해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있고, 구직 시장 내의 수요 증가 추세도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실제로 ‘콘텐츠’ 직무는 문과생이 지원할 수 있는 다른 직무에 비해 매우 많은 수의 채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원티드에서 ‘HRD’로 검색했을 때 39개의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면, ‘콘텐츠’는 129개의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여러 채용 공고 중에서도 ‘콘텐츠’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군은 크게 5개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산업군’을 분류할 때, 고객사의 요청에 따라 콘텐츠를 만들어주는 '콘텐츠 대행사'는 제외했다.)


- 의 (옷 의) : 무신사, 지그재그, 에이블리, 브랜디와 같은 의류 플랫폼 등
- 식 (밥 식) : 배달의 민족, 요기요, 마켓컬리와 같은 식음료 O2O 플랫폼 등
- 주 (집 주) : 직방/다방과 같은 부동산 플랫폼, 오늘의 집, 야놀자/스테이 폴리오와 같은 숙박 플랫폼 등
- 학 (배울 학) : 폴인/퍼블리/DBR과 같은 지식 콘텐츠 구독 서비스, 밀리의 서재/리디북스/윌라와 같은 독서 콘텐츠 플랫폼, 클래스101/탈잉/패스트캠퍼스와 같은 성인교육 콘텐츠 플랫폼
- 흥 (일 흥) : CJ ENM과 같은 영화/드라마/예능 제작 방송국, 크래프톤/엔씨소프트와 같은 게임사, 왓챠/티빙과 같은 OTT 플랫폼
- 부 (부유할 부) : 토스/카카오 뱅크와 같은 핀테크 기업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주’ 산업부터, 삶의 질을 높이는데 요구되는 ‘학, 흥, 부’까지 다양한 산업 전반에서 콘텐츠 인력의 채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직무의 명칭은 ‘콘텐츠 매니저’, ‘콘텐츠 제작’, ‘콘텐츠 에디터’, ‘콘텐츠 기획자’, ‘콘텐츠 마케터’, ‘콘텐츠 PD’, ‘콘텐츠 디자인’ 등 산업/회사마다 약간씩 달랐지만,

채용 공고의 개수만 봐도 ‘콘텐츠’를 코어로 커리어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조사를 통해, ‘콘텐츠 개발’이야말로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이자, 미래에도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3. [타겟 시장의 발견]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산업/회사/직무의 발견

너무 작다 싶을 만큼 작게 시작하라. 이유는 간단하다. 큰 시장보다는 작은 시장을 지배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초기 시장이 너무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분명히 너무 큰 것이다.
– 도서 제로 투 원 中, 피터 틸 -

우선 ‘콘텐츠’ 시장이 매우 성장하고 있고, ‘콘텐츠’와 관련된 많은 직무의 채용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산업이 성장한다, 유망하다’는 정보만으로는 내 성공의 가능성을 점칠 순 없었다.


‘콘텐츠’ 직무의 채용을 진행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다 좋아 보이는 회사였고, 원래 이 세상에 좋은 회사는 많다. 그런데 그 회사가 과연 나에게 좋은 회사일까?


나에게 좋은 회사란 내 가치를 알아봐 주는 회사이다.

회사가 내 가치를 알아봐 주려면, 먼저 내가 그 회사에 가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내가 회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따지기 전에, 내가 회사에 어떠한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입사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입사 후에도 최상의 성과를 만들어내고 ‘회사-나’ 간의 윈윈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내가 책임지고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스스로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다양한 기업의 ‘콘텐츠’ 담당자 채용공고를 스크리닝 하며

‘내가 이 산업과 잘 어울리는 사람인가? 이 산업/기업/직무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과 경험을 갖춘 사람인가? 이 회사에서 만드는 콘텐츠는 내가 잘 만들 수 있는 유형의 콘텐츠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를 통해 구직 활동의 타깃 시장을 최대한 작게 좁히는 것이 내 커리어 피봇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타겟 산업을 발견하기 위한 질문]

콘텐츠 담당자의 역할과 일하는 방식은 산업과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따라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면 ‘오늘의 집’이나 ‘마켓 컬리’처럼 자사 플랫폼 안에서 입점되어 있는 업체와 상품에 스토리를 입혀서 콘텐츠를 탄생시키고 상품의 구매를 유도하는 콘텐츠 기획자와, 교육 상품 콘텐츠를 제작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클래스 101/패스트캠퍼스의 콘텐츠 기획자, 토스 증권과 같이 주식 시장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토스의 정체성이 담긴 이야기로 각색하는 에디터는 모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각각의 직무에서 요구되는 역량이 달랐다.

나는 ‘콘텐츠’를 코어로 삼아 뻗어 나갈 수 있는 선택지 안에서,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산업을 발견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Q. ‘의/식/주/학/흥/부’ 중 내가 오랫동안 꾸준히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지출하는 산업은 무엇인가?
(나의 관심사, 정통한 분야)
Q. ‘의/식/주/학/흥/부’ 산업 중 과거의 HRD 기업교육 컨설팅 경험과 노하우가 가장 쓸모 있게 활용될 수 있는 산업은 무엇인가? (새로운 직무에서 빠르게 적응하여 성취할 수 있는 분야)

두 가지 질문의 답은 모두 자신 있게 ‘학’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내 1년 치 카드 명세서를 살펴보니, 평소 내가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분야는 주로 ‘배우는 활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옷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구독 서비스의 글을 읽고 온라인 강의를 듣고 책을 사고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똑똑해지는 느낌'을 소비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첫 직장도 메가스터디 콘텐츠 기획팀이었고, 두 번째 직장도 교육 컨설팅 회사였으니, ‘학’과 관련된 콘텐츠 산업은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시장이라고 판단되었다.


[타겟 기업/직무 발견을 위한 질문]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산업을 발견했다면, 다음은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기업/직무를 발견해야 한다.

구직활동의 범위를 좁히기 위해 ‘지식 콘텐츠/성인학습 플랫폼’ 산업을 크게 3개의 시장으로 구분했다. 리서치를 통해 해당 시장에 속한 기업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주요 수익원, 비즈니스 모델), 각 기업의 콘텐츠 담당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지 분석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1] 지식 콘텐츠 플랫폼 : 폴인, DBR, 퍼블리, 아웃스탠딩 등
[2] 독서 콘텐츠 플랫폼 : 밀리의 서재, 윌라, 리디북스 등
[3] 성인 교육 콘텐츠 플랫폼 : 클래스101, 탈잉, 패스트캠퍼스 등


(비즈니스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1] 지식 콘텐츠 플랫폼과 [2] 독서 콘텐츠 플랫폼의 경우 주로 텍스트 기반 콘텐츠의 구독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였고, [3] 성인 교육 콘텐츠 플랫폼의 경우 동영상 VOD 교육을 판매하여 주요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였다.


나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과 직무를 선별하기 위해 A4 용지와 펜을 준비했다.

해당 기업의 채용 공고를 읽고, 그 안에 담긴 중요한 문장을 모조리 손으로 써내려 갔다.


각 기업의 채용 공고를 다 쓰고 난 후에는, Job Description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키워드)를 마치 인공지능이 텍스트를 분석하듯 골라내어 형광펜을 칠했다.

그리고 형광펜 칠해진 부분 중 내 강점/적성/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잘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는 업무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미래의 그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채용 공고를 손으로 쓰고, 나와 연관된 지점을 연결하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Visualizing 활동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텍스트(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지만, 내가 8년간 주로 해온 일은 ‘글(텍스트)’보단 ‘말(영상, 강의)’로 된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업무였다.

기업의 직무 매뉴얼, 조직문화 웹진, 리더십 에세이/가이드북 등 텍스트 중심의 디지털 출판물을 직접 집필하고 편집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지만, 이 일이 나의 커리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내외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 내가 가진 글쓰기 역량도 동종업계의 기자/에디터 출신들과 경쟁해서 살아남기에는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다.

반면 HRD 컨설팅 회사에서 각종 도서/자료를 바탕으로 교육 과정 콘텐츠를 만들고, 동영상 교육의 내용을 기획하고, 강사의 스크립트(대사)를 작성했던 경험은 주로 동영상 콘텐츠를 판매하는 온라인 교육 콘텐츠 플랫폼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산업은 ‘성인 교육 콘텐츠 플랫폼’이고, 잘 맞는 직무는 온라인 교육 상품(콘텐츠)을 기획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찾았다!!!!!”

나는 마치 심마니가 광활한 산속에서 산삼을 발견한 것 마냥 환호했다.

드디어, 모두에게 좋은 회사가 아닌, 나에게 잘 맞는 일을 찾은 것 같았다!


이제 구직 활동의 범위를 좁혔으니, ‘내가 이 회사/이 직무에 잘 맞는 사람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관문이 남았다. 원점에서 다시 새 출발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의 확신이 섰다고 한들, 결과를 100% 확신할 순 없다.

회사는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고,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숱한 ‘탈락’ 메일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희망에 차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처절한 실패 이후에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다.

10개월 만에 변화였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고, 취약함과 결점을 정면으로 마주했으며, 이를 고쳐 나가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리고 주체적인 생각에 의해 만인에게 좋은 회사가 아닌, 나에게 좋은 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실패가, 실패를 곱씹었던 10개월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지난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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