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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재미 Nov 13. 2021

[8] 자기 객관화 : 조직세계를 책으로 배웠어요

'나는 직장생활에 실패했다' 8화

이상형(Ideal Type) :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유형.

지식인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이 올라와 있다.

Q. 언젠가 제 이상형을 만날 수 있겠죠?...

A. 대부분 이상형은 만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상형입니다.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답변이었다.

당장에 내 주변만 봐도 운명처럼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고, 이상형과 서로 사랑에 빠져, ‘부부’라는 결실을 이룬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혼해서 잘 사는 친구들에게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물으면 ‘내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이런 면이 정말 좋더라’와 같이 ‘이상형이라서’가 아닌, ‘이상형이 아니어도 결혼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상형은 말 그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머릿속은 나이가 들수록 온갖 ‘이상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고로 조직이란, 조직의 문화란, 회사의 리더란… 이래야만 한다’

그 이상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위’에 가까웠다.


‘내 머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현실과 이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회사(HRD 컨설팅사)에서 8년을 근무하면서 이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다.


내 일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던 업무는 ‘리더십 교육 콘텐츠 개발’이었다.

나는 기업의 리더들의 교육 과정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매일 리더십/조직문화 도서들을 읽고, 책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여 강의안(PPT)과 강의 멘트(스크립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치 어릴 적 드라마나 소설을 보며 연애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듯,

책을 읽으며 조직 세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책으로 세상을 배우다 보니, 두 가지 맹점이 발생했다.

첫째, 책 속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했다.

리더십/조직문화는 과학처럼 정답이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관련 도서들은 항상 기업의 성공/실패 케이스에 대해 사후 결과론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일단 책이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기업이 이례적으로 ‘대박’을 칠 경우 그 기업의 성공을 부각하고, 성공 사례를 분석하여 책으로 출간한다.

사실 비즈니스의 성공과 실패란 ‘운’과 ‘타이밍’, ‘인맥’ 등 노력 외에도 여러 가지 변수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회사의 이 비즈니스가 왜 잘되었는지 혹은 왜 잘 안되었는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일단 결과가 좋으면, 그 과정에서 실행했던 모든 방식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책은 성공의 이면을 다루기보다는, 성공을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 책에 나온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심어 준다.(그래야 책이 팔린다)

나는 그 착각에 빠져 살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책 속에 그려진 조직 세계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항상 뛰어난 리더가 있었고, 팀원들은 모두 유능했으며, 최상의 팀워크로 역경을 극복하고 탁월한 성과를 만들어냈다.(회사의 더럽고 추악한 현실이나, 처절한 실패담, ‘운’이나 ‘인맥’으로 성공했다는 내용을 책으로 박제하고 싶은 기업은 없을 테니 말이다.)

정보의 유입이 실제 현실 세계보다는 책 속의 가상 세계에 치우쳐 있다 보니,

나는 책에 있는 이상과 실제 현실 간의 갭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뿐 만이 아니었다.

나는 리더십/조직문화 도서를 읽으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리더십/조직문화 도서에는 저자의 관점과 그 견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이론과 사례가 담겨 있다.

그들은 다양한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매우 치밀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똑똑한 학자들이 쓰는 글을 계속 읽다 보면, 마치 그들의 주장이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하나의 진리처럼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책을 (감히) 비판의 대상으로 조차 삼지 않았다.

‘유명한 사람, 똑똑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쓴 책이니 맞는 말일 거야’라는 전제를 삼아, 저자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했고 나의 생각과 동일시했다.

그렇다 보니 점점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은 많아졌지만, 이와 비례하여 내 생각, 내 관점, 내 신념은 줄어들었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내가 평소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 리더의 모습’이라고 떠들어 댔던 것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직업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기준은 아니었다.

그저 여러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조직의 모습,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을 마치 나의 생각과 믿음인 냥 착각하고, 앵무새처럼 떠들어댔을 뿐이다.

루닛의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도 평소 책을 읽으며 주입된 대로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을 그려 놓고, 그 회사를 내 이상형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했다.

나는 아직 그 회사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데, 고작 외부에 드러난 텍스트(기사, 후기, 동영상 등) 몇 개만 보고 ‘너무 좋은 회사, 나와 생각이 같은 회사’라고 믿으며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면접이라는 자리는 ‘나’를 어필하고, 내가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이 이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인데, 나는 면접의 목적을 망각한 채 ‘이 회사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하여튼 다 좋습니다’는 사랑 고백을 반복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루닛을 좋아했던 이유, 즉 그 회사의 ‘목적’과 ‘가치’가 내가 직장을 선택할 때 진짜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인가?’ 지금 다시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  

(좀 더 냉정하게 나를 관찰해보니... 내가 회사를 선택할 때 그 회사의 목적과 가치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업무의 성취감과 [이왕이면 높은] 연봉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을 바꾸는 일보다, 내가 즐겁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과, 일해온 환경은 알게 모르게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직 밖 ‘컨설팅사’에서 계속 같은 일을 하고자 했다면, 기존에 형성된 ‘이상만 추구하는 나’의 모습이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선 견고하게 쌓아온 기존의 ‘나’를 부수고, 새롭게 쌓아야만 했다.


또 한 번의 실패를 통해 나는 내 취약함과 결점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고, 거기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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