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언론사: 멀티 커리어의 서막
언론사에서 진행하는
‘기자 만들기 프로그램’ 공지가 떴다.
우수 참가자에게는 인턴 기회가 주어진다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때 나는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도 간다’는 마음뿐이었다.
이 인턴을 지원한 선택으로
내 인생이 평탄하진 않았지만,
멀티 커리어의 첫 장을 열어주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또래였고,
언론·방송을 꿈꾸는 친구들이었다.
강의도 듣고, 실습도 하고,
남녀 혼합 축구 같은 야외활동도 함께하며
금세 가까워졌다.
끈끈한 유대는 프로그램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건
‘서비스 정신과 글쓰기’ 강의였다.
현직 기자이자 대표님이 직접 강의했다.
당시 나는 글을 자주 썼지만 늘 막막했다.
스터디 그룹에서 피드백을 받아도,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았다.
그러다 대표님의 강의를 듣는 순간,
시야가 트였다.
“맞아, 내 글을 읽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만 해도
글 맛은 달라질 수 있겠어.”
그 순간,
글쓰기는 곧 ‘서비스’라는 걸 깨달았다.
독자를 고려해 문장을 다듬는 것,
고객의 불편함을 해결하여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
마케팅에서 핵심 타깃을 설정하는 것 등.
어쩌면 다 같은 원리였다.
그때 배운 서비스 정신은
지금도 나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강의에 감동을 받은 후
‘이곳에서 꼭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프로그램 안에는 과제와 면담 절차가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동기부여가 너무 강력했던 것인지,
그동안 숨겨진 집중력과 잠재력이
그때 잠깐 발현이 되었던 것인지
인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턴으로 들어간 뒤,
대표님이 진행하는 프로젝트 보조를 맡았다.
총선 취재 현장을 따라 전국을 돌기도 했고,
지방 여관에 묵으며 낯선 환경에 적응했다.
현장에선 인터뷰 섭외, 후보 자료 조사,
대표님 SNS 촬영, 심지어 메이크업까지
비어 있는 일을 메우는 게 내 몫이었다.
전문 역량을 깊게 쌓기엔 부족했지만,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감각을 익히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이 감각은 이후
내 커리어를 지탱하는 골조가 되었다.
한 번은 역사기행 프로그램으로
중국 동북 3성을 따라갔을 때였다.
유학 경험 덕분에 중국어 통역으로 동행했는데,
무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게 화근이었다.
대표님이
“중국 아이스크림은 탈이 잘 난다는데 괜찮겠어?”
하고 걱정에도,
“중국 살 때 더한 것도 먹었는데 멀쩡했어요.”
라며 대답하고는 순식간에 하나를 헤치웠다.
그러나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배탈이 났고,
얼굴은 누렇게 질렸다.
결국 대표님은 나의 안색을 보시더니
대형버스를 세워 휴게소에 들렀다.
버스에 타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 하나 때문에 발을 멈춰야 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아찔하다.
그날의 일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지금은 맞아도 그때는 틀릴 수 있다.”
경험했다고 다 안다고 믿는 순간,
언제든 실수한다는 걸 배웠다.
르포 기사를 직접 쓰는 기회도 있었다.
처음엔 설렜지만,
데드라인이 다가올수록 압박은 커졌다.
역사 지식이 부족해 글의 흐름을 정리하지 못했고,
초조할수록 문장은 더 꼬였다.
이렇게 매일 한계를 느꼈다.
더 열심히 배우고 깨닫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책 출간 과정에도 참여했다.
대표님의 초고를 읽고
독자의 시선에서 난이도를 피드백했고,
대표님의 정치인 인터뷰 현장을 따라다니며
인터뷰 방법론을 체득할 수 있었다.
녹음된 인터뷰를 몇 시간이고 풀어쓰며
원고를 정리했던 그 시간들은 고되었지만,
값진 훈련이었다.
지금은 AI가 단번에 해주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때의 경험 덕분에
나는 기록과 정리 감각을 몸으로 배웠다.
대부분의 인턴이 그러하듯
인턴을 하며 나는 전문성을 깊게 쌓기보다는,
넓게 펼쳐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기자직 인턴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참여한 인턴직은
추후 수습기자로 전환될 수 있는 자리였기에,
더 다양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좋은 기자가 될 줄 알았다.
한 발 더 양보해
좋은 기자는 아니더라도
기자는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늘 나에게 맞는 건 아니라는 걸.
좋아하는 것과 적성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