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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하나만 못 팠습니다

프롤로그

by 일상마케터


커리어 이렇게 자주 바꾸면,

이직할 때 회사에서도 싫어할 거고

결국 이도 저도 안 되는 거 아니야?”


서른 즈음인가,

친구가 던진 걱정 돌멩이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방황을 하더라도 서른 정도 되면 뭔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었다.

현실이 야속했고, 답답했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은 대기만성형이야.”
(엄마 나름의 위로였을 거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
“엄마, 난 대기만성형 싫어. 빨리 성공하고 싶어.”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내가 원하는 성공이 어떤 건지 조차 몰랐다.


어릴 적부터 기자가 꿈이었다.


그래서 1년 가까이 ‘언론고시’ 취준생으로

닥치는 대로 언론사에 지원했다.


계속 떨어지자, ‘아, 기자는 안 맞나?’,

‘그럼 PD는?’ 하며 다른 길도 기웃거렸다.


중국 유학생활을 살려 통번역에도 도전했지만,

언어 천재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거 같아 중간에 포기했다.


간신히 언론사 인턴을 시작했을 때, 아빠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때가 있는데…”


그 시절,

유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직장이던 금융사 대신

언론사를 기웃거리는 딸이,

아빠 눈엔 늘 불안하게 보였을 거다.


언론사 인턴 생활은 처음엔 설렜다. 하지만 이상했다.
열심히 할수록 공허했다.


막상 언론사에서 일해보니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거다.

성취감은 채워지지 않았고, 마음은 점점 헛헛해졌다.


그러다 지치면 나는 하늘을 원망했다.
'딱 한 번은 그냥 쉽게 주시면 안되나요?'

'제 인생은 왜 맨날 이렇게 어렵나요?'


당연히 소용없었다.


그때 내 앞에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실에 맞춰 불러주는 곳에 취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것.


고민을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는 가보자’라고 생각하며

두 번째를 택했다.


덕분에 한 우물만 파지 못했다.


스타트업, 중소기업, 글로벌 기업을 다녔고,

항공사와 언론사, 마케팅 대행사, 창업을 경험했다.
인턴에서 팀원, 리더, 임원, 대표 역할도 주어졌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15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누군가에겐 있어 보일지 모르는

이 커리어를 통과하는 시간에,

나는 늘 불안했고, 현재는 늘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겐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그 길은

내가 온전히 내 의지로 원하는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했다.


그렇게,

나의 15년이 넘는 자아 실현을 위한

적성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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