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늘 근사한 행동을 하셨군요. 보답으로 제가 당신에게 카드 하나를 드릴게요. 이 카드는 좀 특이한 카드입니다. 이 카드를 당신을 위해 사용하면 카드의 한도는 2만 원이 되고, 당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하면 한도는 5만 원이 됩니다. 자, 골라보세요. 이 카드, 어디에 사용하실래요?
우리 반엔 가상화폐가 있습니다. 이더리움도 비트코인도 아니고 '인성도네이션 카드'라고 불립니다. 인성 8 덕목(효, 예, 책임, 배려, 존중, 소통, 협동, 정직)에 해당하는 덕목과 아이들이 덕목에 맞게 디자인한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카드에는 자기가 한 행동 중에 덕목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적습니다. 그리고 담임인 저에게 와서 왜 자기가 이 덕목 카드를 얻어야 하는지 설명하지요. 저는 유심히 듣고, 인정할 만한 행동이라 생각하면 서명을 해줍니다. 그럼 이제 이 카드는 저희 반 가상 화폐로써 가치를 갖습니다.
카드의 활용도는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아이들이 만든 학급 가격표의 상품을 구입할 때 쓸 수 있고(화폐단위 1 인성), 연말에 열리는 학교 장터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돈처럼 쓸 수도 있습니다(한 장에 200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부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기부처를 인터넷에서 찾고, 저에게 카드를 제출하면 아이들 이름으로 기부합니다. 기부할 때는 한 장에 500원의 가치를 갖고, 학교 예산 사용은 어려워 제 사비로 기꺼이 기부합니다.
저희 반 태리는 인성 도네이션 카드를 모으는 데 진심이었습니다. 학급 가격표에서 '우리 반 나들이(90 인성)'를 무척이나 사고 싶어 했고, 자기가 모은 카드를 세어보면서 곱하기 200원을 하면 총얼마인지 자주 계산해 보곤 했습니다.
"선생님! 저 벌써 4000원이나 모았어요!"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모으는 태리가 참 귀엽고 예뻤습니다.
어느 날은 태리가 말하더라고요.
"선생님, 저는 쓸 덕목이 없어요. 저는 특별히 착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요."
"태리야. 너는 매일 남을 배려하고,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고, 너와 다른 생각들을 존중해. 그러니까 너는 매일매일 인성 카드를 획득할 수 있어."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고도 태리는 인성도네이션 카드를 쓰는 데 항상 주저합니다. 특별하게 착한 일이 있어야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렇게 특별하게 착한 일이 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한 장 한 장 너무나도 소중하게 모아 오던 카드 중 4장을 어느 날 불쑥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선생님, 저 이거 기부하고 싶어요.
저는 너무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여 물었습니다.
"아직 태리를 위한 건 하나도 못했는데, 벌써 기부부터 해도 괜찮아?"
"네."
태리는 다부지게 대답했습니다.
"누구를 위해 기부하고 싶은데?"
"제가 유튜브에서 봤는데요, 아프리카에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저는 아프리카 쪽에 기부하고 싶어요."
저는 떡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곤 거의 태리를 끌어안다시피 했습니다. 이 기특함을 그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온몸을 부르부르 떨기도 했고요.
저는 태리에게 카카오 '같이의 가치' 사이트를 열어주었습니다.
"태리야, 여기에 엄청 많은 모금함들이 있어. 하나하나 보면서 태리의 2000원이 어디에 가서 쓰이길 바라는지 골라 봐."
태리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어요."
저는 씩 웃어 보이고 다시 태리의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태리가 고르고 고른 기부처는 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단 어린이를 돕는 모금함이었습니다.
저는 '00 초등학교 한태리 이름으로 기부합니다.'라는 댓글을 달고 2000원을 기부했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아니라 왼 엄지발가락까지 알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저희 반 단톡방에 태리의 기부증서를 띄웠습니다.
'태리가 인성도네이션카드 4장으로 2000원 기부했어. 다른 친구들도 멋진 일 함께 하자.'
수환이와 서희가 대답했습니다.
'저도 나중에 기부할 거예요.'
제 기부증서에 쓰인 '기부천사 지니 님' 문구를 보곤 말합니다.
'선생님, 기부천사'
'나는야, 기부천사다. 음하하.'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자신의 선행에 대해 겸손할 필요 없이 '나 대단하지?'라고 인정하는 태도도 가르쳐주고 싶었거든요.
태리 덕분에 오랜만에 카카오 같이의 가치 사이트로 기부를 했습니다. 기부증서에는 '지니 님의 35번째 기부'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732,300원을 기부했더라고요. 태리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오랜만에 기부하면서 본 총액인데 생각보다 많이 기부한 것 같아 저도 놀랐고, 꽤 오래 기부하지 않고 있었다는 생각에 나눔이라는 건 잠깐 깜빡하면 쉽게 잊힌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가끔 저희 아이들의 미래를 기대해 보곤 합니다. 나를 위해 200원을 쓰지 않고, 남을 위해 500원을 내어주는 태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태리의 20대와 30대와 40대는 어떤 빛깔을 띄우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