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을 반짝이며 올리비아가 물었다. 나보다 한참 커서 올려다봐야 했는데 때마침 하얀색 가깝게 빛나는 금발 뒤로 햇빛이 쏟아져 그녀는 마치 하나님 같았고, 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1 같았다. 그녀는 인자한 눈웃음과 함께 미소 지으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반박할 바를 찾지 못해, 아니 반박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삶은 나이스했다. 왜냐면 그녀가 그녀의 삶을 나이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올리비아 후로 6년 동안, 나는 자신의 삶을 나이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나이스한 인생은 다 어디로 갔는가.
6년 전, 스리랑카로 배낭여행을 갔다. 스리랑카는 습하고, 시끄럽고, 예뻤다. 습한 건 참을 수 있고 예쁜 건 좋은데, 시끄러운 게 싫어서 황급히 스리랑카의 수도를 벗어나 ‘웰리가마’로 향했다. 웰리가마는 서핑 입문자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해변가 마을이다. 숙소는 해변 바로 뒤 게스트하우스로 정했다.
수도에서 웰리가마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창문이 안 닫히는 기차를 탔고, 뚝뚝 거리는 뚝뚝을 탔다. 떡진 머리에 지저분한 츄리닝 상태로 15킬로 배낭을 둘러메고 오후 4시쯤에야 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습했고, 더웠고, 허리가 아팠지만 시끄럽지 않아 좋았다. 스리랑카 아저씨가 로비에 앉아 졸길래 체크인을 부탁했다. 아저씨는 저기 저 여자에게 가보라고 턱짓을 하곤 다시 졸았다. 나는 저기 저 여자에게 갔다. 올리비아였다.
“체크인 좀 부탁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올리비아예요.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여행하고 있으니 물어보거나 부탁할 일 있으면 저를 찾아주세요. 여권 부탁해요.”
요즘 아이돌 뉴진스의 민지 양을 보면 ‘왜 명화에서 사람이 튀어나왔지? 다시 명화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도무지 현실 사람 같지 않은 이질적인 느낌 말이다. 그때 올리비아가 그랬다.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밝은 미소와 친절함과 산뜻함이 도무지 현실 사람 같지 않았다. 떡진 머리에 거북목이 될 정도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대충 서있는 나와는 종족 자체가 달라 보였다. 머쓱한 순간이었다.
“여기 여권 돌려드릴게요. 조식은 7시부터 먹을 수 있어요.”
“댕큐.”
겨우 여권을 받아 들며 찌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벨라(내 영어 이름). 혹시 요가 좋아해요? 매일 아침 7시에 요가 클래스를 열어요. 티칭은 제가 하고요. 한 수업에 만 원(대강 한국 돈으로 만원 정도 했다)이에요. 관심 있어요?”
“오. 저 요가 진짜 좋아해요.”
“오, 그래요? 저는 지금 요가를 가르치면서 여행하고 있거든요. 여기서는 요가 수업을 해주는 조건으로 무료로 머물고 있고, 요가 수업으로 돈을 벌어서 여행비를 충당하고 있어요.”
“와. 그럼 얼마나 머물 예정이에요?”
“아직 몰라요.”
“그럼 여기 다음엔 어디에 갈 거예요? 다음 나라도 생각해 놨어요?”
“얼마나 여행할지, 어디로 갈지 아직 몰라요.”
와....라고 입은 움직였지만, 나는 그녀의 ‘아무런 계획 없음’이 낯설어서 눈동자가 공허하게 위로 돌았고,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던 것도 같다.
“제 인생 너무 나이스 하지 않아요?”
올리비아가 물었다. 자기 인생이 나이스하다는 말을 실제로 내뱉는 걸 처음 봤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잠시 짱구를 굴렸는데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아니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짜, 나이스하네요.”
그때 내 나이는 27 쯤, 올리비아는 30 쯤이었다. 스물일곱의 나는 '누구는 어디를 취직했네, 얼마를 버네.' 하면서 한창 불만 중이었다. '교대를 가지 말았어야 해.'부터 시작해서 27년의 인생 전체가 후회요, 슬픔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언니가 다음 행선지는 모르겠고, 지금 여기에서 요가 수업과 게스트하우스 스탭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자기 인생이 나이스하단다. 한치의 후회나 요만큼의 불안함도 없이 선명하고 또렷한 눈동자로 말이다.
그녀의 인생은 정녕 나이스했다. 왜냐면 그녀가 자기 인생을 나이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을 모조리 다 아는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인생만큼 나이스한 인생이 있겠는가.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 로비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올리비아 인생은 나이스한 게 맞는데, 그럼 왜 내 인생은 나에게 나이스한 인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한 해 한 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밥 굶을 걱정은 없게 되었고, 때때로 여행도 나와볼 수 있는내 인생은 왜 자꾸 나에게 천대받아야 하는가.
나는 맥주를 네 캔 째 홀짝이다 결심했다.
“내 인생은 나이스해.”
남은 스리랑카 여정을 모두 버리고 웰리가마에 눌러앉았다. 아침엔 나이스한 인생을 사는 올리비아의 요가 수업을 들었고, 낮엔 서핑을 하고 낮잠을 자다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밤엔 여행객들 틈바구니에 껴서 비치클럽에 놀러 가거나, 맥주를 홀짝이며 여행객들의 나이스한 이야기를 들으며 낄낄 거렸다.
그렇게 웰리가마에서의 내 인생은 나이스했다.
한국에 돌아왔다. 나이스할 수 있는 인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의 인생을 나이스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좀 더 부자일 수 있는데, 좀 더 편할 수 있는데, 좀 더 예쁠 수 있거나 좀 더 자식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인생들이 이어졌다.
나는 생각했다.
나이스한 인생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은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을 들고 왔습니다.
자기 인생은 나이스하다던 올리비아 후에 오랜만에 자기 책에 무려 '끝내주는 인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나타나 반가운 마음입니다. '이슬아 작가 인생, 끝내주지.'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읽어보니 '인생은 어떤 방식이더라도 끝내주는 거야.'의 의미로 붙인 책 이름 같더라고요. 역시 이슬아 작가는 독자를 자꾸 골탕 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