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계의 모든 생명들은 한 번 지구상에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자기 다운 삶을 걱정 없이 누리고 간다.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까? 인간 역시도 이 지구 위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인간적인 생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게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어야 맞다. 기껏 태어났는데 살아가는 것을 막막하게 느껴야 하고,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니. 그런 게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라면 신이 너무 무책임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구의 절반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나머지 절반은 돈을 두고 쩐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안에 떨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무책임한 삶에 떠밀려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은 아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던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개발 수준을 가리지 않고 굶주림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식량 주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자급하고 지역에서 자립하며 살아가던 전과 달리, 지금은 식량이 지구화된 분업과 시장 경제에 떠맡겨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남반구에서는 식량을 자급하던 농가에서 커피나 카카오와 같이 북반구의 사치품으로 쓰일 환금 작물을 짓느라 식량이 없어 굶주린다. 선진국에서는 수출국가에 식량을 의존해야 함에 따라 계속해서 오르는 외식값과 식재 값으로 인해서 질 좋은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다. 당장 매일 뉴스에서만 직장인들이 편의점 음식을 주로 먹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도시인들이 먹는 식량은 전부 상품이 되었다. 현대의 일상에서 개인들은 기업에 식량 주권을 빼앗긴 셈이다. 식량이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원 대신 미심쩍은 첨가물, GMO, 농약으로 범벅되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청정한 먹거리대신 수입산 종자와 농산물을 먹어야 하고, 수출 국가, 외식 및 식품 업계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세계적 식량 분업 시스템은 비교 우위 이론을 내세우며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졌으나 사실은 낭비도 이런 낭비가 있을 수 없다. 쌀이 주식인 민족이 구태여 미국에서 들여온 쌀을 먹어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생산지와 소비지의 거리가 짧고, 가장 체질에 맞는 자국의 먹거리가 어쩌다 가장 비싼 먹거리가 된 것일까? 뿐만 아니라 쌀을 수출하는 국가가 정작 자국민들 먹을 쌀이 없어 영양실조와 기아로 허덕여야 하는 모순까지 발생한다.
모든 인간이 먹고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인간답게 삶을 영위하려면 무엇보다 양질의 식량이 보장되어야 한다. 굶어 죽느냐 아니냐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구 한쪽 편에서는 낭비되는 식량, 음식물 쓰레기, 과식과 과소비로 신음하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한쪽 편에서는 기아와 영양실조로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고, 말 그대로 진흙을 퍼먹는다. 인류 역사 이래 온 인류가 이토록 불균형한 영양 분배를 겪은 것은 아마 근래 들어 처음일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먹지 못해 굶주릴 걱정 없이 식량이 모두에게 고루 분배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처럼 식량이 고루 분배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부족해서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사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쌀, 밀, 옥수수 등 주곡만 치더라도 전 세계 80억 인구가 하루 900그램~1kg의 곡물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 밥을 매일 열 공기나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곡식들이 인간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는 것은 이 중 대부분이 인간의 식량자원으로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산업과 바이오매스 등 기업의 금전적 이익으로 쓰이기 때문이다.실제로 귀농해서 곡물을 기르더라도 인간이 먹을 주곡류를 기를 때보다 축사에 사료로 쓰일 곡물을 기를 때 정부 보조금이 많이 나온다.
비인도적인 축사의 환경이 문제가 됨은 물론, 사실 육류는 그렇게 효율적인 에너지원도 아니다. 육류 1인분은 곡식 20인분에 맞먹는다. 곡식에 비해 육류는 열 배 가량의 물과 일곱 배의 노동력과 땅을 필요로 한다. 내가 소고기 1인분을 먹는다는 것은 20명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곡식을 혼자 독식하는 것과 같다.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더 많은 인간에게 식량을 돌려줄 수 있다.
육식을 하는 것보다 곡식을 직접 먹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굳이 고기를 먹어 굶는 사람 스무 명을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구태여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찌 보면 약탈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지구는 인간이라는 생물종만 80억 마리가 존재한다. 인구 과밀이다. 전 인류가 생활 수준을 높이고 육식을 하려 들면 지구는 버티지 못한다. 노동력도, 땅도, 물도, 곡식도 지구의 한계 이상으로 소비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양질의 식량으로 배부를 수 없어진다.
인간과 가축이 고작 몇 퍼센트에 불과했던 지난 시간과 달리 지금은 인간과 가축의 행성이 되었다. 목축을 위해, 목축을 위한 농업을 위해 다른 생물들의 터전과 생태계의 보고를 침탈하는 행위 역시 야만이다.
단순히 육식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옳지 못한 방식으로 생산된 음식 일체를 불매한다.
기업은 깨끗하고 건강한 음식을 빼앗아 음식 흉내를 낸 가공 식품을 내놓는다. 임금 노동은 양질의 음식을 챙겨 먹을 여유를 빼앗아 간다. 기업적 농업과 종자 회사는 토종 종자를 빼앗아 간다. 수입과 수출을 거치는 식량은 수입 국가에게선 자국 식량의 설 자리를, 수출 국가에게선 자급농가의 농지를 빼앗아 간다. 육식은 초식 동물에게 줄 곡식을 위해 인간에게서 식량을 빼앗아 간다. 양식업은 건강한 해양 생태계를 빼앗아 간다.
처음엔 오롯이 나를 위해 채식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유해한 식량 체계에 반대하기 위해 채식을 한다. 나는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한 사람에게라도 더 나누고자, 공생하고자 채식을 한다. 모든 생명이 자기 다운 삶을 누리길 바라서 채식을 한다. 빼앗긴 식량 주권을 되찾고, 되찾아 주고자 채식을 한다. 되도록 집밥을 먹고, 커피를 끊고, 가공식품을 사지 않는다. 못난이 농산물을 먹고, 아껴 먹고, 불필요하게 소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