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한 달 반 가량의 풀타임 노동으로 온 몸 구석구석에 다양한 증상이 나타났다. 피부과, 안과, 정형외과를 돌아가며 병원을 방문했다. 늘 피로누적이 원인이었다. 피로누적으로 인한 무릎 통증, 면역 저하, 시야 이상 등등. 어이가 없었다. 한 달 반 일하고 이렇게까지 몸이 안 좋아질 수 있다고?
원래부터 스트레스나 외부 자극에 취약하고 예민한 사람이긴 했다. 신체가 보내는 신호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사람이라 무언가 잘못되면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약 5주 가량 사무직 일을 하면서는 건드리지 않아도 귀의 혈자리가 욱신거릴 지경이었고. 아무튼 간에 일을 하러 갈 때마다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이런 유리같은 몸뚱아리로 어떻게 매일 풀타임 근무를 하나.
사실 말은 안해도 모두들 건강 상에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강요된 임금 노동에 대해서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바치고, 무너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번 돈을 다 쓴다. 고작 한 두달 사이에도 이렇게 엉망이 되는데, 이걸 평생 반복하니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하다. 비단 나만 몸이 약하고 예민해서가 아닐 것이다. 물론 내 몸이 특히나 더 예민한 것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생명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무리하면 잘못되고,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가 낼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있다. 그걸 알기에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한다. 무리해서 일을 벌이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한한 성장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 체제 등은 어떻게든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무한히 생산하기를 원한다. 모든 생명체는 개체수가 일정한 정도로 유지된다. 만약 단위 면적 안에 너무 많은 동일 개체가 자리하게 되면 개체수를 조절한다. 천적이 먹어치우든, 자식 수를 조절하든 일정 수준안에 유지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생명체의 원리를 무시한다. 국력이라는 말로 인간을 무한히 생산해내길 원한다. 지구의 땅과 자원에는 한계가 있는데, 영악하기 짝이 없어 이젠 무적이 된 인간이 개체수를 무한히 늘려봤자 자기 목 조르기나 다름없다. 출생률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가 소멸이니 뭐니 하지만 인간이 있고 국가가 있는 거다. 국가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있고 자본이 있는 거다. 자본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교환하는 규모로 시장 경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굳이 더 무언가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본의 정언명령은 어떠한가. 무조건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고, 많은 이윤을 남겨서, 많이 축적해야 하고, 많이 성장해야 한다. 이건 생명체의 작동원리에 반하는 명령이다. 생명체는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원하지도 않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과식하고 과로하라. 자본주의가 원하는 바를 한 줄 요약하면 이러하다. 그러나 생명은 과식하면 괴롭고 과로하면 괴롭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스템안에 욱여넣으며 살고 있다.
사실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어찌저찌 수영 강사 일자리를 구했다. 솔직히 스스로 준비가 많이 안 되어있고,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당연히 일을 못구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기회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습니다, 하며 사양하기에는 배포가 크지 못했다. 나는 겁이 많았다. 다음에 면접을 본다고 한들 붙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하겠다고 덤볐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게 겁이 없는 건지 겁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준비도 안 된 주제에 해보겠다 객기를 부렸으니.
문제는 내가 내 삶의 자유를 빼앗겼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나마 좋아하는 수영을 업으로 삼자고 했던 건데, 그마저도 하루에 8시간씩 하고 있으면 오히려 몸에 무리가 갈 것만 같다는 점이다. 교육을 받으러 다니는 동안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의 부족한 실력에도 그렇지만, 또 다시 집에서는 먹고 잠만 자다 하루종일 일터에서 굴러야 하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도 그랬다. 그걸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건 운동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수영 강사 일은 당장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선택한 차선책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지역 사회부터 바꿔 나가는 것이다.
변화를 원하면 스스로 변화가 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세상의 변화가 되고 싶다. 아무도 기후위기와 인권, 노동권 등의 문제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가 원인임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 기제에서 뻗어나온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 세워진 사상누각같은 지금의 국가 및 경제 체제는 정당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연의 섭리에 벗어난다. 그러니 기후든 식량이든 오염이든 한계에 부딪히는 건 필연적이다.
우리는 지구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지구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은 실질적으로 암컷이 진화의 선택권을 쥐고 핏줄을 이어간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축적하기 위해 약자를 착취하지 않는다. 자연은 늘 평형을 이룬다. 원처럼 돌고 돌아 중심을 유지한다. 선처럼 뻗어나가 무한히 성장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오로지 지금의 체제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고, 호도한다.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모든 문제의 연관성을, 그 뿌리를 짚어주는 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직도 사람들은 '머스크 형'을 롤모델 취급하고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고 멸시하고 과시한다. 나는 이런 사회에 맞서 싸워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늘리고 싶다. 인간이 어떤 태도로 자연을 대하고 삶을 대하고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다.
자연농을 할 수 있는 농지를 얻어서 흙과 풀이 주는 치유의 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치유 농가 프로그램과 함께 자연식물식 식단의 간소하지만 깨끗한 힘, 그 순수한 태초의 맛을 알리고 싶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가진 힘을 끌어올리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질 때 나오는 시너지를 느끼면 사람들도 자각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바다를 좋아하니 다이빙처럼 자연 속에서 할 수 있는 즐거운 운동도 곁들여 운동 재활, 운동 치료 프로그램도 병행하고 싶다. 겸사겸사 해양 정화 활동도 하고.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잠들어 있던 의식을 깨어나게 해주고 싶다. 인간 사회가 지금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흔히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자본 생산성 높은 '갓생러'가 되는 게 아니구나. 경쟁하지 않는 것. 무리하지 않는 것. 흘러가는 대로 고요하게 사는 것. 즐겁게 사는 것.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 착취하지 않는 것. 생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기계 에너지를 빌려가며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하는 것. 아끼고 사랑하는 것. 이런 게 진짜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구나, 이게 삶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지역사회, 주변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바꾸어 나가는 거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꺼번에 뒤바꿀 순 없겠지. 하지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부터 진실을 알리고, 느끼고, 바라보게 만들다보면 점점 올바른 길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편, 지구의 편, 약자의 편을 늘려 나가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자. 이 견고한 사회에 균열을 내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처럼 예민한 사람도, 유약한 사람도, 24시간 노동 기계로 살아갈 자신이나 여건이 안되는 그 누구라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겠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게 일년 전인데, 목표는 앞으로 최대 5년, 서른이 되기 전에 자리를 잡고 시작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직 해외도 가리지는 않는다. 어디든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시작할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빨리 시작할 예정이다. 길을 잃지 말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게 내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