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스피드를 자랑하는 것은 커피다.
라고 내가 말한게 아니라 이 나라에서 직접 막 선전한다. (자랑이 아니야 사람들아.)
하지만 인정한다. 커피 하나는 빠르다.
나오는 것도 빠르지만 주문도, 섭취도 모두 빠르다. 그래서 오자마자 한 3-4개월간 적응 아닌 적응을 해야 했던 것은 이를 위한 시간 안배였다. 누군가 나에게 커피 한잔 하러 갈래? 라고 하면 그게 나에게는 최소 30분 이상을 의미했던 반면 이 곳 사람들에게는 10분 정도의 짧은 순간인걸 알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일단 가게 선택이 빠르다. 소상공인의 나라, 영세사업자의 나라인지라 커피숍 브랜드 따위는 없다. 물론 그 안에서 쓰는 커피는 다 일리나 라바짜, 킴보일지언정... 그래서 그냥 코너마다 있는 가게에 가면 된다. 스타벅스 없다. 그래서 괜히 다른나라 가서 스타벅스 보면 꼭 우리나라 거 보는 거 같은 반가운 기분이 드는 상황 연출.
가게 들어가서 주문이 빠르다. 거의 전국적으로 가게마다 주문하는 커피 종류는 통일되어 있고 거의 3가지로 압축된다. 에스프레소, 마끼아토, 카푸치노. 이 외에 다른 것도 물론 이것저것 있지만 실제로 주문하는 이탈리아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마치 우리나라 어느 냉면집엘 가도 결국 메뉴는 비냉 물냉 회냉으로 압축되는 것과 같은 이치.
마시는게 제일 빠르다. 에스프레소든 카푸치노든 우리나라처럼 뜨겁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아다시피 양이 눈물만큼 나온다. 경건하게 설탕 한봉지 털어넣고 숟가락으로 그거 섞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뒤 설탕이 다 섞였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원샷.
그리고 퇴장한다. 왜냐하면 커피를 주문하고 받아든 곳은 계속해서 새로운 손님이 와서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분주한 곳이기에, 더 오래 서 있으면 민폐다. 이렇게 한 입에 털어넣는 커피를 위해서만 앉을 자리를 찾는 것도 괜스레 번거롭다. 커피를 마시자고 결의한 뒤 다 마시고 나오는데까지 약 10분 정도 걸린다. 가장 큰 변수는 결의한 곳에서 커피숍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일뿐 그 이후는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빠르게 끝나는 행사인 줄 모르고 초반에 한번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시켰다가 일단 시킨 거가 나오는데 오래 걸리고(시키는 사람 많지 않아서 점원들이 익숙치 않아 자꾸 미룸), 커피는 뜨겁고, 동행들은 순식간에 다 마셨고 나만 혼자 붙잡고 난감하게 뜨거운 한사발을 들이킨 적이 있었다.
여러가지 불문율은 또 많아서 카푸치노는 아침에만 마시는 음료다. 물론 한밤중까지도 얼마든지 시켜먹을 순 있지만 점심 이후로 카푸치노 시켜먹는 건 대부분 외국인 뿐이다. 우유 들어가서 배부른, 약간의 식사대용의 음료로 여기며 이 나라 사람들은 아침에만 주로 마신다. 그래서 오후에 카푸치노 주문하면, 관광지 아닌 동네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렇다면 이 커피는 어디서 마시느냐. 가게에서 서서, 바에서 마신다. 커피가게 = 바
영국에 펍이 있고 한국에 주막이 있다가 다방/커피숍으로 진화했다면 이탈리아에는 바가 있다. (이탈리아 생활 최고 권위자가 말하는 거니까 알아서 희석해 들으시길..)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술집을 연상케하는 bar가 이탈리아에서는 술집이 아니다. 약간의 술도 팔긴 파는데 여긴 그냥 간단히 뭘 먹고 마시고, 특히 커피 한잔 하러 가는 카페다. 주로 아침에는 카푸치노와 코르네또(크로와상) 하나 먹으러 가고, 점심 땐 샌드위치 사먹으러 가고, 오후엔 여기서 아스크림도 먹고 간식도 먹다가, 저녁엔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동네마다, 코너마다 있는 바는 그야말로 동네 사랑방이자 어른들 놀이터. 여는 것도 어찌나 일찍 여는지 아침 6시반이면 다들 커피 마시러 오라고 유혹하며 문 열어놓는다. 이런 동네 바 덕분에 로마 시내는 곳곳에서 게스트하우스/작은 호텔 영업이 수월해진다. 호텔 내에서 아침식사 제공을 직접 안하고 근처 바랑 협약 맺어서 손님들에게 쿠폰 주고 바로 보내버린다.
가게의 형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바 안쪽에 있는 종업원에게 주문해서 음식을 건네받아 바에 놓고 서서 먹는게 가장 기본이다. 자리에 앉을수도 있지만 동네가 아닌 조금 번화가의 경우엔 자리세가 따로 붙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신기한 건 꼭 계산대가 따로 있어서 늘 같은 주문을 2번 해야 한다는 점. 가게마다 순서는 달라서 먼저 돈을 내고 음식을 받든가 음식 먼저 먹고 돈을 내든가는 달라질수 있다. 하지만 거의 예외없이 계산대가 따로 있는게 인상적이다. 음식 내주는 사람과 돈 계산하는 사람, 각각에게 내가 먹고 싶은거, 내지는 먹은거를 읊어줘야 주문과 계산이 완료되는 고용창출적 시스템. 둘 간의 소통은 전무. 손님이 무조건 두번 읊어야 한다. 고객 신뢰도가 높은 나라인건가.
6개월을 넘어선 지금은 에스프레소에 매우 익숙해졌으며 이제 양 많고 배부른 커피보다 소화제같이 한 입에 털어넣는 커피가 왠지 더 합리적인거 같다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초반에 회사에 네스카페 인스턴트 커피 한통 들여놨다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걸 생각하면 매우 많은 변화이다.
로마에서의 커피 값은 비교적 싸다. 서서 먹으면 에스프레소 한잔에 90센트 - 1.2 유로 사이. 대부분 거스름돈을 원활하게 관리하기 위해 1유로 정도로 통일한다. 짜장면 값, 빅맥 값과 비슷하게 생필품 물가 중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가격을 동결하진 않아도 지역별로 관리는 들어간다. 물론 자리세가 붙거나 카푸치노와 같이 추가 재료가 들어가는 경우는 더 비싸진다. 시내 관광지에서 자리에 앉아 커피 마셨다가 한잔에 5유로 넘게 냈다고 막 하소연하는 글들이 가끔 올라온다. 그걸 보며 같이 어머 너무 비싸!! 라며 거품물다가 생각해보면 그래... 한국에서는 기본이 한잔에 5-6천원이었던가.
우리나라에서 카페라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문할때 유의할 사항은 바로 이름. 영어든 한국어든 라떼가 어차피 외래어니까 별뜻 없는 이름으로 퉁쳐질 수 있고 그래서 다 줄여서 라떼라 해도 우유 들어간 커피로 이해되지만 라떼는 이탈리아어에서는 그냥 우유다. 그러니 커피숍 가서 줄여 말한다고 라떼 달라고 하면 그냥 우유 나온다. 우유 달라는데 커피 줘도 큰일날 일 아니겠는가.
쌉싸름하고 따끈한 커피를 마셔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고 기대했던 마음 앞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덩그러니 놓이면 얼마나 허무한지 모른다. 하지만 늘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이탈리아 우유는 우리나라 우유보다는 훨씬 고소하고 맛있으니 즐기면서 마실만도 하다.
라떼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탈리아 단어는 커피와 관련된 용어가 많다. 카푸치노, 카페,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카페라떼, 리스트레토, 카페 룽고... 등등. 커피 단어와 음악 단어 외에는 매우 적지만 그래도 그나마 그게 어딘가. (밤을 패며 쇼핑을 하던 밀리오레가 이태리어인줄 아셨던 분 손.)
이 나라의 커피 섭취습성이 다른 또 하나는 대부분 밥 먹고 커피 마실때 굳이 자리 옮기지 않는다는 것. 우린 식당서 밥 먹고 나면 꼭 다른 커피숍으로 자리 옮겨서 또 자리잡고 주문하는 반면, 여긴 밥 먹은 식당에서 먹은거 치우고 다시 주문받아 바로 해결. 이렇게 말하면 엄청 효율적인거 같지만 식당에서 밥 먹는게 점심때도 기본 한시간 반 이상 걸리기 때문에 결코 이 방식이 더 빠르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입에 털어넣는 에스프레소 먹는데 테이크아웃이 굳이 필요할까 싶지만은 의외로 테이크아웃도 많이들 한다. 나는 흡연가가 아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담배 한 대 피우며 마시는 커피를 얼마나 즐기는지 봐와서 감정적으로 그 즐거움에 적극 동조하는 편이다. 다만 우리같이 제대로 된 종이잔에 딱 맞는 뚜껑 덮어주는게 아니라 소주잔같은 작은, 정말 1회용스러운 플라스틱 잔에 담아준뒤 뚜껑 달라 하면 호일 북 뜯어서 덮어주곤 한다. 어딘가 시골 다방에서 받아오는 것 같은 분위기.
커피 관련해서의 이색 포인트 하나는 바로 인삼 가미 커피다.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 커피를 죽 살피다 보면 인삼이 들어간 제품이 많다. 의외의 인삼 애호국이었구나 이탈리아. 진열된 인삼커피 볼때마다 신기하고 궁금은 한데 막상 사게 되지는 않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