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이유
오늘은 오랜만에 정말 피곤했다. 주하와 하원 후에 꼭 들렸던 놀이터도 패스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한숨 자고 일어난 남편이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아빠와 신나게 놀다가 목욕하고 수박까지 신나게 한창 먹고는 뒷정리하는 아빠 뒤에서 서성거리는 주하를 향해 물었다.
“주하는 언제 행복해?”
뜬금없는 엄마의 질문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내 품에 달려온다.
“지금"
한껏 찌그러지는 주하의 그 특유의 활짝 웃는 얼굴에 겹쳐지는 그 대답에 가슴에 행복이 가득 차오른다. 아.. 이런 게 행복인가?
그런데 사실 몇 개월 전만 해도 주하는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곤 했다.
“주하는 언제 행복해?”
“다섯 시 반에"
어? 이건 어떤 반응이지?
5시 반?
가만.. 5시 반에 우리 주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아이가 이렇게 딱 꼬집에 구체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분명 한두 번의 경험이 아니라 일관된 경험이라는 것인데. 물론 4세 아이는 자신의 추상적인 상상 역시 실재 경험과 구분하지 못해 어른들을 자주 헷갈리게 한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곳에서의 무한 상상이 가능한 나이. 그래서 주하의 5시 반이라는 표현 역시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그렇지만 엄마라는 본능에 조금 더 집중하여, 나
는 주하의 말을 실재라고 믿고 5시 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주하야… 엄마가 왜 5시 반인지 모르겠어.”
질문은 꼭 물음표로 끝낼 필요는 없다. 물음표가 주는 강제성과 위압감 부담감을 나 역시도 잘 알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부탁조의 제안을 쓴다. 나를 솔직하게 표현해 보는 것이다. “5시 반이 왜 좋아?”라고 묻는다면 아이의 머릿속에 ‘답'을 알려 주려고 하겠지만 “엄마는 왜 5시 반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나를 궁금해하는구나..’라고 아이가 엄마와 더 정감 있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오니까!”
아이는 올라간 입꼬리를 더 추켜올리며 말해준다.
아! 아빠가 오는 시간이구나! 한동안 아빠가 주하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는 시간이 5시 반이었다. 아빠를 만나는, 그러니까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그 시간이 주하에겐 행복한 시간이었을까.
그런데 내 머리는 또 양갈래로 흩어진다.
어린이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그 시간이 행복했을까?
아빠를 만나는 것이 행복했을까?
아이의 맘을 더 들여다보고 싶지만, 어떤 날은 집으로 가서 행복했을 것이고, 어떤 날은 두 팔 벌린 아빠로 인해 행복했겠지. 어떤 누구도 어떤 누구의 행복을 가늠할 수는 없으며, 어떤 행복도 정량화시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까. 그저 우리 사랑스러운 주하가 행복했던 그 시간과 또 행복한 지금 이 시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나 또한 그 행복을 만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