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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Nov 24. 2018

위선자 혹은 보통사람 그 어디즈음의 누군가들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핑크리본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매주 스터디를 하는 것도 좋지만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 이유였다. 10km 마라톤은 오랜 만이기도 하고 올해는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었다. 천천히 뛰더라도 완주만 하자는 마음으로 달렸고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이 걸려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세먼지가 조금 꼈지만 오랜만에 가을하늘 아래 서울을 달린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메인 무대에는 마라톤의 참가자이자 기부자들의 이름이 적힌 구조물이 있었는데 내 이름을 찾아 사진도 찍었다. 오랜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대회에서 준 우유와 빵을 먹었지만 허기가 가득했던 우리들은 어떤 점심 메뉴를 먹을까하고 즐거워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마라톤 장소였던 여의도 인근에는 일요일 점심에 문을 여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2~30분 하이에나와 같은 마음으로 음식점을 찾아다니다가 약간 낡은 빌딩 지하의 푸드코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국밥과 밀면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드러서게 되었다.



식당에는 빨간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이 스무명 남짓 되어보였다. 근처 공사장 등에서 용역 일을 하시는 분들 같아보였다. 식당은 소란스러웠고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들은 분주하고 정신없어 보였다. 우리는 대낮부터 고기를 시켜먹기로 하고, 삼겹살 3인분과 목살 3인분을 주문했다. 20~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옮길 에너지도 없었기에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냐고, 어! 미리 계산 안했어? 빨리 계산 안해?" 열테이블 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남자의 고성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남자는 언뜻 보기에도 키가 185는 넘어보였고, 얼굴은 검었다. 그 풍채와 인상 만으로도 한 눈에 거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 옆 테이블에 소주 시키셨었죠? 테이블에 몇 개씩 먹었는지 좀 세어보구요." 키가 남자의 가슴 정도 밖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왜소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처음에 들어올 때부터 똑바로 잘 안보고 계산 안했어? 빨리 계산 안 해? 와 씨.." 당황해서 테이블을 돌아다니는 아주머니의 말에는 아랑 곳하지 않고 남자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끝날 것 같았던 남자의 고함은 한 동안 이어졌다. 사람들은 잠깐 그 쪽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국밥에 수저를 담갔다.



점점 화가 끌어 올랐다.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할까. 아니면 딱 봐도 미친놈인 거 같은데 역시 괜히 끼어들지 않는 편이 좋을까.' 그 날은 강서구에서 어떤 남자가 테이블을 치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날이기도 했다. 이러다 이제 말겠지라고 화를 참았다. 화를 참은 것인 단지 비겁했을 뿐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이것은 사회적 책임에 준하는 일인지 반하는 일인지도 역시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아주머니는 엄마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공무원의 박봉으로 두 자식을 길러내기 위해 엄마가 한 무수히 많은 일 중에는 식당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도 혹시 이런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때 누군가가 엄마를 구해줬을까.



그 순간 아주머니가 약간 울음섞인 목소리로 담담히 외쳤다.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저도 이러면 상처받아요." 그 순간 입술을 질끈 감았고, 눈물이 살짝 핑 돌았다. 아주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기 대문이었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본인이 상처입도록 스스로 내버려 두지 않아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서 감사했다. 무엇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대고 있는 내가 더 이상 비겁하게 남아있지 않게 해줘서 감사했다.



내 삶 속에서 겪었던 폭력의 첫 순간을 기억한다.  일곱 살 무렵, 동네에 흔하게 있던 일간지를 들고 신문놀이를 한답시고 이곳저곳에 신문을 뿌리고 다니던 날. 캄캄한 지하 단란주점 계단에서 올라오던 그 순간, 무릎으로 배를 찍히고 두들겨 맞던 그 때. 생각해보면 그 때 진짜 무서웠던 건 나를 때리던 그 주먹과 발이 아니었다. 나를 노려보며, 불을 지르러왔냐고 고함을 지르던 그 입술도 아니었던 것 같다. 1층으로 올라와 거리에서 나를 둘러싸고 빙 둘러쌓여있던 그 사람들. 심드렁한 눈빛과 도저히 그대로 얼어서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손과 발들. 도저히 나를 구해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들도 지금 나 정도의 나이였었을까. 나처럼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위선적인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들도 나처럼 한 달이 지난 이 시점에도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분해하는 사람이었을까. 다음에도 이런 순간들이 또 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들도 나처럼 그저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당히 용기없고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었겠지.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도 그 사람들을 용서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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